강론15 - 순복하고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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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15) 순복하고 바라보기
지난번에 제가 드린 공식은 여러분의 이해를 돕게 될 열쇠입니다. 그것은 먼저 지적으로, 그리고 나서는 깨달음의 과정에 있는 여러분의 영혼 속에서 이해될 것입니다. 우리가 3가지 깨우침에 관한 논의를 더 완전히 들어가는 동안, 잠시 이야기를 벗어나겠습니다.
공식: 먼저 지성이 순복하고 나서 '봅니다,' 그 다음 가슴이 순복하고 나서 또 '봅니다,'마지막으로 영혼이 깨어나면서 '압니다.'
이 공식은 여러분이 깨우침을 경험하고 있는 과정의 순서일 뿐만 아니라 그 방법에도 모두 적용됩니다. 제가 이 단어들을 표현한 방식에 주목하세요. 저는 "여러분이 깨우침을 경험하게 '될' 과정의 순서"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했다면 깨달음이 지금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되고 혹은 제가 여러분과 조금은 다르다는 뜻이 될 테니까요. 여러분의 지성 속에 완벽하지 않으면서 제 지성 속에도 완전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점을 아세요. 그리고 지금은 여러분도 그 점을 아실 때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미 깨어있다고 말씀드렸고, 여러분의 지성과 제 지성의 유일한 차이는 제가 이 단어들을 완전하게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그 말을 숙고하기는 했지만, 지금, 그 외의 다른 생각은 불가능하다는 점 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누구인가 이며, 저는 꾸준히 이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을 뜨세요. 그러면 여러분도 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수업들을 통합해서 완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른 모든 것 중에서도 여러분이 포용해야 하는 첫 번째 경험은 "순복"입니다.
여러분의 지성과 가슴이 완전히 열릴 수 있기 전에, 왜 항복하기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여러분이 무언가를 잃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여러분이 스스로 빛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속아왔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여러분의 지성만이 여러분을 고향으로 인도할 길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여러분은 그 일을 오래 전에 해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스스로 어떤 것이라도 해낼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영원이란 여러분 지성에 있는 개념일 뿐이지, 체험은 아닙니다. 개념이란 신념이며 진실에 의해 결코 대체될 수 없습니다. 첫 번째 발걸음은 그 개념을 완벽하게 놓아주는 것이며, 여러분이 "걸어야 할 길을 모른다"는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로 가야할지 혹은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할지, 여러분이 모른다는 점을 시인할 때까지는 안내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점을 시인할 때, 길은 여러분 발 밑에서 밝게 빛나고 고향에 대한 기억이 되돌아옵니다.
에고에게 있어서, "나는 모른다"는 진술은 연약함 혹은 실패의 표시입니다. 실제로는, 그 말이 지혜를 향한 첫 번째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깨우침을 얻는 여정에 여러분을 단단히 올려놓습니다. 여러분이 받을 수 있는 도움은 상당히 많지만, 여러분이 항복하고서 스스로 실패했다는 점을 시인할 때까지는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이 여러분을 조롱하고 싶어 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을 때까지, 그 진실을 완전히 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모른다"는 사실을 포용하는 것만이, 성령(聖靈)이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는데 필요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것은 마치 문을 부수고 열면서 빛의 광선이 들어오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둡고 불길하게 보였던 방안에 있는 물건들이 지금은 정말 있는 그대로 보입니다. 그것은 잠들어 있는 여러분 지성의 순진무구한 투영입니다. 그것들은 놓아주면 가버립니다만, 진실에 이르기 위해 그것들이 어찌어찌 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지성은 어떤 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몫입니다. 지성은 추측하고 심판을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심판들은 과거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과거에 대해서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미래도 그와 같이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성은 모든 것에 대한 그 제한된 지식을 모든 경험 속으로 끌어옵니다. 그 사고체계의 전제(前提)가 미친 것임을 한번도 고려하지 않고 말입니다. 지성에게 현재의 순간은 결코 보이지 않는데,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다리일 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숙고해볼 만한 가치가 거의 없다고 여깁니다. 지성은 잠시 동안 이 거룩한 순간에 머무는 것이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주 전체에서 에고에게 가장 위협적인 일인데, 왜냐하면 여러분이 가야할 곳, 할 일,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을 시인해야 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완전히 무력하다는 점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에고에게 있어서, 이것은 여러분이 실패했으며 어떤 것도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그것은 여러분의 가장 위대한 성공에 여러분이 매우 가까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과거를 보내고 미래를 조금도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면 현재라는 순간이 여러분 앞에 나타나서, 여러분이 상상한 것 말고는 결코 떠난 적이 없는 곳으로 여러분을 데려갈, 빛의 등대로 보일 것입니다.
"나는 모른다"의 경험이라는 순간 속에 머무세요. 따뜻한 담요처럼 그것이 여러분을 감싸게 하세요. 그 담요는 이 세계의 텅 비어 있는 모든 함정으로부터 여러분을 계속해서 자유롭게 해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기로 허락만 한다면, 이것은 여러분의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놓아줌으로써 여러분이 바라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때, 여러분이 두려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일시적인 그 어떤 것도 지금 여러분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에고에 대한 완전한 포기야말로 여러분이 진정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여러분을 데려갈 유일한 길입니다.
이 공식에서 여러분이 숙고할 두 번째 단어는 "본다"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보지 않기 위해 혹은 실제로 그곳에 있지 않은 것을 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인도되고 있음을 '보는 것'은 이 세계의 기능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남겨진 영원한 세계의 기능입니다. 여러분이 영안(靈眼)에 눈 뜰 때, 즉 깨달음이 정말 무슨 뜻인지를 알 때, 현실은 실제 있는 그대로 여러분 앞에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그곳에 있는 것을 '봅니다.'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것(환상) 대신에, 그곳에 있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그토록 간단한 것이라고 한번 생각해 보지 않겠습니까? 찰나 전에 여러분이 보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결코 바뀌지 않은 것을 기꺼이 '보시겠습니까?'
Bro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