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18 - 깨달음의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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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18 깨달음의 안내
여러분은 강도 놓은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여러분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깨닫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평화조정자가 될 것을 요청 받았지만,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합니다. 평화에 관한 혹은 평화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에 관한 세상의 생각과는 매우 다릅니다. 이 점은 여러분에게 이미 분명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현실에 여러분의 눈이 뜨이기 시작하고 있지만, 아직 반만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번에 두 개의 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꿈의 세계로서 여러분이 이 불가능한 토대 위에 세워진 세계를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결코 바뀌지 않는 진실을 여러분이 명료하게 '볼' 수 있는 세계입니다. 여러분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들 두 세계 사이를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할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차이는 단지 미묘하고 인지하기 어려울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두 세계는 곧 더욱 명확해질 것이며, 여러분은 더 이상 그 진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곧, 여러분의 눈이 더 크게 떠질 것이고, 꿈의 세계는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여러분의 지성이 아닌 자아 전체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인류와 현실에 대한, 그리고 여러분에게 완벽히 이해될 모든 것에 대한 진정한 봉사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나아가기 전에 한번 더 '두 번째 깨달음'에 관한 강좌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깨달음'을 고찰하기 전에 우리가 함께 밟아야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를 밟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짜 경험이 아니라 단지 개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각성된 가슴'은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할 것인데, 거기에는 진짜 토대가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목표를 달성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여러분이 일단 '두 번째 깨달음'에 완전히 눈을 뜨기만 하면, 어떤 노력도 없이 '세 번째 깨달음'이 저절로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먼 길을 왔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스스로 갈 수는 없으나 지금 여러분이 밟아야만 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제가 이곳에 있으며, 이것이 '깨달음의 안내(Enlightened Guide)'의 기능입니다.
지난 2개의 강론에서, 여러분은 먼저 자신을 '깨어난 가슴'으로서 포옹하라고 요청 받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포옹하면서 그것이 같은 것임을 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포옹한 "여러분"은 바뀌지 않는데, 단지 준거기준이 다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여러분이 육체로 상징화되는 여러분 자신에 대해 더욱 친밀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에고는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자아와는 분명히 달라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에고는 에고의 눈이 아닌 여러분의 눈을 통해 보기 때문에 이 분리의 신학을 위한 단단한 상자를 만듭니다. 에고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에고가 육체를 만들었으며 여전히 육체를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에고는 '신의 비전(Vision of God)'이 모든 과거의 육체들을 연장하고 그것들을 하나로 형성하며 요구한다는 점을 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누군가의 내면에 있는 '깨어난 가슴'을 요구할 때, 그것이 여러분 자신이든 여러분과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이든지 간에, 여러분은 '깨어난 가슴'을 요구하는 존재입니다. 이 말이 이해되기 시작합니까? 이것은 우리가 “받는 것이 주는 것 속에 있다(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고 말할 때의 의미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주는 것이 제가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여러분이 이 진실을 이해하고 경험하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여러분 지성 속에서 안개와도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여러분에게 '마스터 스승(Master Teacher)'이 주어진 것입니다. 마스터 스승이란 지금 여러분이라고 주장하는 안개를 정화시켜 왔으며 여러분이 같은 일을 할 때 여러분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의 스승은 여러분의 위나 아래에 서 있고자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스승은 단지 여러분이 다른 이들에게 다리가 되는 것만큼 여러분의 지성과 가슴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 빛 속에 있는 것이 보일 때, 그 기능은 완벽한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스승은 여러분으로부터 어떤 것을 가져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여러분이 갖겠다고 요구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왔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 내면에서 살아있고 열려 있으며, 세상을 사랑하는 가슴을 여러분에게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이드로써 제 인격을 요구하는가, 아니면 또 다른 개성을 요구하는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두 같으며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 지점에서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해야만 합니다. 지금 여러분 가슴에서 일어날 필요가 있는 미묘한 움직임이 있는데, 여러분 자신이 실제보다 훨씬 더 멀리 왔다고 확신한다면 그런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스터 스승은 여러분을 집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보이죠. 그에 따라, 여러분에게 주어질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같은 것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스승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가슴이 아닌 그 스승 자신의 가슴을 통해 '볼' 것을 요청합니다. 여러분의 가슴은 여러분이 완전히 항복하는 순간에 여러분 존재에 급류처럼 밀려올 빛을 담을 정도로 충분히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깨달음을 달성한 사람의 첫 번째 역할이 그들 뒤를 걷고 있는 이들에게 다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다리만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특정한 정체성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깨달음에서 마지막 단계의 본질은, 여러분이 더 이상 다른 어떤 존재와 다르다고 정체성을 분류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처럼 깨어나고 있는 다른 존재들과 말입니다. 내면에 있는 '부처의 본성인 불성(佛性)'으로 돌리는 것은 여러분의 '그리스도 의식(Christ Consciousness)'을 향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각각은 준거 기준이지 그 이상도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우리 모두를 통해 흐르는 영(Spirit)의 영원한 움직임에 연결시켜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제공하는 다리의 목적입니다.
다음 3일 동안, 자주 제 가슴을 통해 바라보세요. 의식적으로 세상을 보시고, 마치 제가 그 모든 것을 겪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여러분이 겪는 모든 것을 보세요. (역주; 마스터 예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이 다리를 건너서 반대쪽에 이를 때, 우리가 같다는 점을, 우리가 같은 가슴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알' 것이고, '볼'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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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 행할 수 있는 수행의 한 기법입니다. 종교인이든 명상인이든 일반인이든 자신이 지극히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마스터 스승의 가슴을 통하여 세상을 살아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가상세계를 살아보는 것인데 진실은 이것이야말로 3차원 물질세계의 환영을 극복하고 참다운 세계의 일단을 체험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합니다.
여러분은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그 영화는 3차원 물질세계와 4차원 심령세계의 상호작용을 아주 실제적으로 묘사한 수작입니다. 차원은 서로 다른 방과 같아서 서로 작용하기가 힘들고 영향을 미치기도 쉽지 않아요. 하지만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그 작용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3차원에 살면서 4차원을 이해한다는 것은 영화에서 보듯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어떤 사람이 4차원 까지 이해하고 산다면 그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는 매우 남다를 것입니다.
영화에서 보듯이 사랑하는 애인이 죽어서 천상계로 가지 못하고 데비무어를 찾아와도 그녀는 알지 못하죠. 죽은 애인은 데미무어를 관찰할 수 있지만 그녀는 못 알아보고 죽은 애인에게 있어서 영혼들 끼리의 작용은 너무 실제적이지만 인간은 만질 수도 없고 소리를 전할 수도 없죠. 영혼의 입장에서 보면 3차원 현실은 홀로그램과 같아서 손으로 만지면 그냥 쑥 통과하죠. 우리가 느끼는 이 딱딱한 현실이 실은 한차원 높은 4차원의 영혼 입장에서 보면 환영인 거예요. 여기서 고승들이 깨닫고 나서 오도송을 부르며 왜 세상을 환(幻)이라 표현하는지 이해하시겠죠?
여러분의 에고가 완전히 항복하여 모든 것을 진아의 요구에 맡기고자 하면 진아가 방사하는 신성의 빛이 여러분의 가슴에 쏟아져 들어오는 데, 아직 가슴이 열리지 않아 그 빛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 스승의 가슴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대하는 수행을 일상 속에서 행하는 것이 매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우리시대를 수행의 시대라 하였습니다. 이제는 수행을 무슨 특별한 사람이나 하고 수행을 하자면 개소리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산속에나 가야 하는 것으로 아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1984년 “丹”이라는 책이 세상에 나와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사람들에게 생소했던 단전호흡이라는 말이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 상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옛날에는 수행인들 사이에 비급으로 알려져 이 수행법을 전할 때는 그 사람(인연자)이 아니면 전하지 않고 전할 때도 그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않겠노라고 혈서로 맹서하고 전하던 그 수행법이 지금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건강법이 되었습니다. 22년이 지난 오늘날... 그래도 강산이 두 번 변한 시기이죠. 그만큼 지금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합니다. 우리시대가 깨달음의 시대인 이유는 또한 순환하는 우주적인 시간대가 깨달음의 빛이 그 어떤 시기보다 왕성하게 지구로 유입되고 있고 모든 우주적인 비밀이 누설되는 열린시대, 음양합덕, 신인조화의 황금시대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햇빛이 날 때 곡식을 말려야 하듯이 지금은 영적 각성을 위한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는 시대이니 만큼 일상생활 속에서 대중적으로 웰빙과 깨달음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영적 수행을 생활의 중심에 두세요.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전면적으로 상승시키고 개선하는 핵심비결입니다. 삶의 4가지 영역인 건강과 풍요, 인간관계와 자기가치를 제고하는 길은 영적 깨달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감정이 몹시 상하여 이성을 마비시킬 때,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인 석가나 공자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을까를 가슴으로 받아들여 그분들의 입장에서 처세해 보는 것입니다. 장을 보면서도 마스터 예수라면 장바구니를 들고 어떻게 장을 볼까, 생각해 보는 것이죠. 아마 우아하게 장을 보았겠죠. 시장판에서 깊이 패인 주름으로 나물을 파는 할머니의 물건을 악착같이 깍지는 않을 걸요.^^ 이렇게 범사에 스승의 가슴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며 처세해 보세요. 이것은 심오한 수업입니다. 이 수행의 끝에서는 그 멀게만 느껴졌던 석가, 공자, 예수님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영으로서 우리는 하나이며 내안에 마스터가 거한다는 자각을 자연스럽게 얻게 되실 거예요. 예수가 자신을 신격화하여 떠받들어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이죠. 예수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요 자매라고 하였습니다. 강론의 매 끝 인사로 Brother 라고 쓰는 것도 우리와 예수님은 한 형제라는 뜻이죠.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것도 우리들 각자의 가슴에 거하는 그리스도 의식(하느님을 알아보는 의식)이 각성되어 대중적으로 깨어나는 우리시대의 특징을 반영하는 사건입니다. 인류의 가슴이 깨어나지 않고서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 하느님이 직접 오셔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다”는 성구는 진실로 심오한 언급으로서 여기서 “나”는 예수 자신을 뜻하는 말이기 보다는 우리들 각자의 가슴에 거하는 그리스도 의식의 각성을 두고 언급한 겁니다. 그리스도 의식은 신성의 빛과 우리의 하위자아를 연결하는 다리이며 통로입니다. 그리스도 의식은 자신이 빛과 사랑임을 아는 우리 안의 진정한 의식입니다. 그리스도 의식은 만물을 하나로 보는 의식입니다. 분리의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바로 보고 만물의 정수와 사랑의 교감을 나누는 의식의 영역이 바로 그리스도 의식입니다.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불성과 다르지 않아요. 석가의 자비나 공자으 仁이나 예수의 사랑이 서로 다른 가르침이 아니듯이 수행법이 천갈래 만갈래로 나뉘어도 결국 종착지는 한곳입니다. 그러니 불가에서도 만법이 귀일(萬法歸一)한다하고 유가에서는 오도관일(吾道貫一)이라하며 선가에서는 포원수일(抱元守一)이라하고 기독교에서는 유일신(唯一神) 사상으로 모두 하나(一)자리를 말하고 있고 우리 속언에도 “하나도(一道)모르는 게 까분다”는 말이 있고 옛고서에 천지대도(天地大道)는 일도야(一道也)라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와서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름 하여 道라합니다.
이제 인류의 의식이 성숙하여 분리에 초점을 맞추고 상승상리를 주장하며 서로 쟁투하다가 큰 그림 속에서 모든 것이 하나임을 자각하고 “모든 것은 하나다”, “분리는 환상이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통일의식을 자신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통일의식이 일상에서 영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한 첩경으로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자신도 거대한 유기체의 한 부분이고 신의 일부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통일의식을 가지고 생활해보세요. 숨을 쉬면서도 걸음을 걸으면서도 새록새록 솟구치는 깨달음에 가슴 뛰는 삶을 사시게 될 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
늘 기쁨 속에 머무세요.
빛과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