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포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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管;대롱 관
鮑 ; 절인 물고기 포
之; 갈 지
交; 사귈 교
관포지교는 기원전 7세기경 제나라 명재상 관중과 포숙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관중과 포숙은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사이었다.
후에 관중은 명재상으로 명성을 얻게 되는데,
그가 명재상이 되기까지는 친구였던 포숙의 공이 지대했다.
관중과 포숙은둘 다 보통 인물이 아니였지만, 관중이 좀 더 똑똑했나 봅니다.
두 사람은 벼슬길에 올라 관중은 공자(公子) 규(糾)를 섬기게 되고 포숙아는 규의 아우 소백(小白)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두 공자는 왕위를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하게 되어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적이 되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소백이 승리했고, 그는 제나라의 새 군주가 되어 환공(桓公)이라 일컫고, 형 규를 죽이고
그 측근이었던 관중도 죽이려 했는데. 그때 포숙아가 환공에게 진언했습니다.
"관중의 재능은 신보다 몇 갑절 낫습니다. 제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으로도 충분합니다만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관중을 기용하셔야 하옵니다."
환공은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정사(政事)를 맡겼고.
재상(宰相)이 된 관중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마음껏 수완을 발휘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패자(覇者)로 군림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나라가 춘추전국시대의 손꼽히는 나라 중에 하나로 우뚝 서게 됩니다.
관중이 포숙아에 대하여 말하기를
1) 형편이 좋았던 포숙아는 자본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관중이 이익금을 독차지 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포숙아는 관중이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다.
포숙아는 관중이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이해하였다.
2) 관중이 장사를 잘못하여 큰 손해를 보아 곤중에 빠졌을때도 포숙아는 관중을 우매하다고 하지 않았다.
시운이 이롭지 못하여 손해를 본 것이라고 관중을 감싸주었다.
3) 세 번 벼슬에 나갔다가 세 번 다 쫓겨났어도 포숙아는 관중을 무능하다가 하지 않았다.
시운을 만나지 못한 것이라 하였다.
4) 함께 전쟁에 나가서는 세 번이나 도망을 쳤는데도 포숙아는 관중을 겁장이라 하지 않았다.
관중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왕 앞에서 관중을 변호하여 관중의 목슴을
구해 주었을 뿐 아니라 자기보다 더 높은 벼슬에 관중을 천거하여 주었다.
5) 공자 규가 패하였을 때 동료이던 소인은 싸움에 죽고
관중은 잡히어 욕된 몸이 되었지만 관중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라 하지 않았다.
관중은 작은 일에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는
큰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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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숙아의 도움으로 생명을 얻고다시 한번 세상에 재능을 떨칠 기회를 얻은 관중은
제나라 주변국의 작은 나라 35개국을 병합하여 부국강병을 이룬다.
관중의 실수와 잘못을 덮어 주고 관중을 끝까지 믿고 그를 밀어준 포숙아...
관중은 포숙아가 죽었을 때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나를 낳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아는 것은 오직 포숙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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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키키키님의 댓글
역으로 그 안에 강한 빛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강한 빛을 감추기 위한 환각의 두께는
다른 존재보다 더 강력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깨우지 않으면 영원히 잠들어 버리는
잠에 들어있다면
상위자아는 우리를 깨우기 위해
뺨을 때리고 몸을 흔들어대며
온갖 고통을 줄 것입니다...
의식상승님!!
저는 많은 도움을 드릴 순 없지만,
의식상승님께서 분명 잘 이겨내실 거라 믿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도 우숩지만,
어설프더라도 좋게 봐주세요^^*
힘내세요...!
의식상승님의 댓글
<관포(管鮑)>란 기원전 7세기 중국 춘추시기의 정치가 관중과 포숙아를 가르키는데 그들 둘은 어릴 때부터 아주 절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관중은 가난하였고 포숙아는 비교적 부유하였지만 그들은 서로 이해하고 서로 믿으면서 사이좋게 지냈다. 그들이 함께 장사를 할때 가난한 관중은 출자금을 조금냈지만 포숙아는 이익을 똑같이 나누면서 관중은 집이 가난해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오히려 <돈이 이만하면 모자라지 않겠느냐>고 묻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관중의 말을 듣고 일을 시작했다가 일을 망친적도 여러번이였다. 그래도 포숙은 성내지 않고 <일이 꼬이는 것은 자네 탓이 아니라 운이 따라 주지 않아서 그런거니까 너무 미안해 하지 말게나>라고 하면서 관중을 위안하였다. 관중은 선후로 3차례 관직에 오른적 있는데 그때마다 파직되였다. 그럴 때마다 포숙아는 관중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아직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고 했다. 관중이 참군한후 작전도중 그가 도망을 쳤는데 포숙아는 그가 죽음을 겁냈다고 비웃은 것이 아니라 늙은 어머니를 봉양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감싸주었다고 한다.
그후 관중과 포숙아는 희공(僖公)의 신하가 되였다. 당시는 제나라 국정이 혼란한 시기여서 왕자들은 화를 면하기 위하여 앞다투어 다른 나라에 도망가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관중은 노나라(魯國)에 거주한 왕자 규(糾 )를 보좌하고 포숙아는 왕자 소백(小白)을 섬기게 되었다. 그 뒤로 얼마 안가서 제나라(齊國)에는 폭난이 일어 국왕이 살해되어 나라에는 군주가 없게 되었다. 이 소식에 접한 왕자 규와 소백은 왕위를 찬탈하고저 서둘러 제나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두 군대가 맞붙게 되었다. 규를 왕위에 올리고자 관중은 소백에게 활을 쏘았으나 화살이 소백의 혁띠의 연결고리에 맞아 빗나가는 바람에 소백을 죽이지 못하였다. 결국 소백이 국왕이 되었는데 이 사람을 <제환공(齊恒公)>이라 부르게 되었다.
국왕이 되자 제환공은 왕자 규를 죽이고 관중을 옥에 가두었다. 제환공이 포숙아를 재상으로 삼으려하자 포숙아는 자신은 재상이 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옥에 갇힌 노나라의 관중을 추천하였다.
포숙아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는 나는 관중을 능력을 따를 수 없습니다. 관중은 너그럽고 인자하며 충실하고 진실합니다. 관중은 국가의 제반 제도를 새롭게 제정하고 규범화할수 있을 뿐만아니라 또한 군대를 지휘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런한 능력이 구비되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페하께서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반드시 관중을 재상으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간언했다. 이 말을 들은 제환공은 동의하지 않았다.
<관중이 쏜 활에 나는 죽을번하였다. 내가 그를 살려 준 것만으로도 큰 덕을 베푼 것이다. 그런 자를 재상으로 삼으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다>
그러자 <현명한 군주는 앙심을 품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하물며 당시 관중은 왕자 규에 충성하여 행한 일이 아닙니까? 한사람이 주인을 위해 결사적으로 일할수 있다면 군왕을 위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줄로 알고 있습니다. 관중 없이는 페하께서 천하를 통치하기 어렵습니다. 페하께서는 꼭 관중을 등용하여야 합니다.> 라고 간언을 하였다. 마침내 제환공은 포숙아의 말에 설복되였고 관중을 제나라의 재상으로 삼는다.
제나라에 돌아온 관중은 재상이 되었고 포숙아는 관중의 옆에서 돕는 일을 한다. 관중과 포숙아가 마음을 모아 나라를 다스린 결과 제나라는 제후국들 중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된다. 제환공은 제후들 중 맹주가 되었다. 제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하여 천하의 패자로 군립할 수 있었던 것은 관중의 뛰어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제나라가 융성하고 관중이 대업을 이룬 데는 포숙아의 큰 우정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포숙아가 죽은 후 관중은 그의 묘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관중은 포숙아에 대한 고마움을 회고하면서 < 내가 보좌하던 왕자 규가 실패했을 때 다른 대신들은 죽음으로 충성을 맹세했지만 나는 기꺼이 옥살이를 택했다. 그럴 때에도 포숙아는 나를 비웃지 않았다. 포숙아는 내가 대업을 이루기 위해 일시적 명성을 초개같이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진정으로 나를 아는 사람은 포숙아다.>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