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이해


행복(행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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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행복)이란?  


행복은 사람에게 복이 아주 많은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무슨 일이 무사히 잘 이루어지면 참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다행이라는 말은 행복이 많다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물어보면 여러분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요? 아마 여러분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삶의 이유를 말할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이유는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자 그렇다면 진정한 사람의 행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소망하는 바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그 소망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커다란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소망하는 바라를 반드시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모두 자신의 소망하는 것을 꼭 이루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행복한가요? 여러분은 여기에 여러 가지 답변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 나는 지금 불행합니다.” 또는 “나는 지금 매우 행복합니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현재 고통일 수도 있고 행복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사람은 늘 행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복해지는 것은 여러분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지금 행복하다는 것은 세상을 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이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각기 자신이 이루어야 할 소망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사람들이 왜 자신이 세상을 살고 있는지 잘 모른 경우가 많습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세상살이가 정말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의 의미조차 잃어버린 채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고통은 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 앞에 의식이란? 글에서 의식상승는 삶의 모든 것이 의식에서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모든 고통의 시작이 나의 생각과 마음의 자리에서 오는 것이 맞습니다. 고통은 모두 나의 내면에서 나오게 됩니다. 사람에게 고통이 발생하는 이유는 생각과 마음에서 사물을 대할 때 또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마다 어떤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 판단에는 어떤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이 이원성이라는 낡은 의식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판단이란 좋은 것과 나뿐 것, 선과 악, 빛과 어둠, 천사와 악마 등으로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이원성적인 사고방식에서 시작됩니다. 이원성이란 모든 사물의 본질이 아닙니다. 이원성은 모든 사물을 왜곡하여 바라보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원성의 판단은 고통의 시작입니다. 이제 이원성에 의한 판단을 멈추어야 합니다. 이제 이원성은 낡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세상은 늘 어떤 불균형 속에 있어왔습니다. 의식이 높아진 사람들은 늘 풍요로움 속에서 살아가지만 낮은 의식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오직 물질적인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의식이 물질에만 가있는 것입니다. 빈곤 역시 물질적인 것을 중심 삼으면서 생겨나는 의식입니다. 유물론을 굳게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하나의 전쟁터로 비추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돈이 많은 사람만이 힘이 있고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자의 것이라는 생각과 판단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물질에 기초한  판단은 사람을 본질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에 머무는 이원성은 왜곡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오직 물질만을 추구하는 물질적 풍요는 진정한 풍요가 되지 못합니다. 진정한 풍요는 영적인 풍요를 말합니다. 사람의 가난은 영적으로 빈곤한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빈곤한 것은 물질적 빈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의식이 확장되지 못하면 언제나 빈곤에 시달리게 됩니다. 사람은 본래 빈곤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면 사람은 본래 “신성”이기 때문입니다. 신성은 늘 무한한 풍요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을 고집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않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을 받아 드리지 못하는 작은 마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되 남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나만 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을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부재하면 그 자리에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사랑의 판단에서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커다란 고통을 만듭니다.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면 먼저 그 사람을 정확히 알아야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어떤 한 사람을 알려고 한다면 오래도록 사귀어 봐야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사귀어본적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쉽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사람을 어느 정도라도 알고 나면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판단은 늘 상대방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그러한 오해는 고통이 됩니다.


아직도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하물며 그런 상태에서 남을 함부로 판단하다가는 큰 고통을 불러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한 판단은 스스로에게 큰 고통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기 보다는 깊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사람이 상대를 정확히 알아야 그 사람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고 존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행복이여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보면서 서로 행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어떤 고통을 받는데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의식이 낮은 곳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를 아프게 한다면 그는 나에게 있어서 누구입니까? 지금 당신의 곁에 있는 사람이 고통으로 다가 온다면 당신은 그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지금 당신의 곁에 가까이 있는 존재는 누구입니까? 당신에게 그들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지금 당신의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왜 여러분의 가까이에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지금 당신을 행복하게 하나요? 아니면 어떤 고통을 주고 있나요? 이 세상에서 우연한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생부터 나와 어떤 연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하물며 내가 다른 사람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면 다른 사람을 모르게 됩니다. 나를 모르고 남을 모르면 그것은 어두운 삶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모르면 세상을 모르는 것이고 세상을 모르는 것은 당연히 고통의 시작이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잘 모르면 사람을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직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르며 세상도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육은 잘못되었습니다. 지금의 교육은 사람이 본래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교육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가르치기 보다는 오직 물질적인 측면에만 치우쳐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인지 가르치지 못합니다. 기존의 교육방식은 낡은 교육방식입니다. 기존의 낡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12년간의 기본교육을 받고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서 길을 잃고 방황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많은 고통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육의 기초는 사람이 본래 영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영으로서 모든 인간은 위대한 존재입니다. 교육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자기 자신이 본래 신성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자신이 본래 신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그것을 깨우치고 나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사람들이 큰 고통에 쌓여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이유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므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나와 남에 대하여 깊은 자각이 없으므로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부족은 인간을 커다란 고통 속에 빠뜨리는 가장 큰 요인입니다.


현세의 사람들은 오직 사람들에게 돈을 버는 일을 위주로 교육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돈을 중심삼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의식이 물질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한 지경에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못합니다. 오직 돈만을 쫒는 풍요는 진정한 풍요가 아닙니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일입니다. 그것은 반쪽의 풍요입니다. 진정한 풍요는 영적풍요와 물질적인풍요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현세의 종교라는 것도 잘못되었습니다. 종교라는 것도 자신들의 권좌를 유지하는데 골몰하여 사람이 본래 신(神)이라는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해왔습니다. 사람에 대한 종교의 우매화 정책은 사람들이 자신을 신의 종이나 노예쯤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완전히 신의 종속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본래부터 신이였던 사람이 자신이 신인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감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이 본래 신이라는 것을 모르게 되면 신성과 인간의 분리라는 불가능한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신과는 전혀 무관한 존재로 알고 있으며 종교의 세뇌에 의하여 자신을 신의 종속물이나 신의 종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거짓에서 사람들은 커다란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본래부터 신이였던 존재가 자신이 신인 줄 모르고 살아감으로 인해서 억지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다수 인간은 거짓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육신차원에서만 이해하면서 사람의 본질인 신성을 알지 못한 채 서로가 서로를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쪽의 삶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지극히 존중하는 교육을 받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아직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사람이 자기의 본질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니 이것은 인간의 무지입니다. 사람은 신이 인간으로 현신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신입니다. 사람은 물질로 이루어진 몸으로 육화한 신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본래 신이 인간으로 온 것인 줄 모르기에 행복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게 됩니다. 신은 신다울 때만이 행복한 것입니다. 신은 무한한 사랑, 무한한 풍요, 무한한 기쁨, 무한한 감사, 무한한 이해, 무한한 용서, 무한한 창조, 무한한 행복에 있습니다. 그것이 신의 존재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실에 대하여 모르는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 오직 돈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의 삶의 목표가 오직 돈이라는 영역에 제한되어 버리면 그 사람은 사람보다 돈을 더 높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병리현상입니다. 돈이란 삶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어도 오직 돈이 삶의 목적과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평생 동안의 굴래가 되어 허망한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행복하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가치 있는 삶입니다. 가치 있는 삶이란 나와 남을 지극히 존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사람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이란 자신이 원하는 소망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소망이란 무엇일까요? 소망이란 내가 가슴속에서 원하고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마다 소망하는 바가 각기 다릅니다. 사람의 소망은 수많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에는 거룩한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소망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분들이 있다면 고요히 눈을 감고 진정으로 나의 소망이 무엇인지 자신의 가슴속에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가슴은 그 소망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언제나 여러분의 가슴속에서 말해왔습니다. 다만 여러분은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사람마다 그 소망하는 바가 다릅니다. 의식이 낮은 사람은 낮은 소망을 바랄 것이고 의식이 높은 사람은 거룩한 소망을 지향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본래 신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신성이지요. 여러분의 소망은 머지 안아 모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나와 남을 비교하고 좋은 것과 나뿐 것을 비교하는 낡은 의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뿐 것과 좋은 것을 비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낡은 의식 중에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나뿐 것과 좋은 것은 본래 없지만 사람들은 나뿐 것과 좋은 것이라는 이원성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서로 비교하면서 좋은 것이라 여기는 것을 높이고 나쁜 것이라 하는 것을 업신여깁니다. 이러한 비교의식은 지금까지 이 세상을 지배해 오던 대표적인 낡은 의식입니다.  낡은 의식은 세상을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누고 분리시켜놓았습니다. 비교의식은 모든 것을 볼 때 둘로 나누어 분리해서 바라보는 이원성(二元性)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하나로 되돌아가는 삼원성(三原性)의 시대입니다. 삼원성이라 함은 통합성(統合性)을 말합니다. 이러한 통합성은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일원성(一元性)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원성을 모든 것을 분리 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통합해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로 투명하게 통합해서 보는 것을 투명성(透明性)이라고 합니다. 이제 모든 것들이 점점 더 투명해져 갈 것입니다.


인간이란 누구나 자신이 사랑받지 못했을 때 스스로가 불행하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항상 사랑받으며 살아가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래 신인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나온 본래의 자리는 사랑입니다. 인간은 사랑에서 시작되고 사랑에 머물다가 다시 사랑으로 되돌아갑니다. 사람이 평생을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먼저 사랑이 되어야합니다. 사람이 “사랑이 된다.”함은 사랑을 중심으로 삼고 용기, 인내, 지혜, 확신, 자비, 기쁨, 명료성, 이해, 깊이, 풍요, 관용, 조건 없는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성의 심오한 자리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신의 자리입니다.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할 때도 아무런 생각 없이 말을 함부로 합니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말은 허망한 말입니다. 그러한 말은 모두 땅에 떨어지는 말이 되고 맙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 잘 모릅니다. 사람이 어떤 말을 할 때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서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지금 자신도 잘 모르는 자기 마음으로부터 강력한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지극히 존중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지고한 깨우침입니다. 내가 나를 정확히 알아야만 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남을 알아야 세상살이가 힘들지 않습니다. 나와 남을 정확히 알면 세상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정확히 알면 세상을 누구보다 잘 살아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한 삶을 이루는 길입니다. 사람은 어떤 말을 할 때 자신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나의 행동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나의 생각, 나의 마음, 나의 말, 나의 몸, 나의 행동 등에 대한 앎이 깊은 곳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도 알 수 있고, 이 세상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 삶이 커다란 행복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삶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알지 못하는 것을 “무명(無明)이라 합니다. 아직도 수많은 인류가 낡은 기운에 가득 쌓인 채로 지극한 어둠속에서 해매이고 있습니다. 세상살이는 한편의 꿈과 같습니다. 그것은 깊은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깊은 잠에 취해 있는 존재는 자신이 어찌해서 그러한 고통 속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외부로의 여행은 자신을 더욱 미혹하게 합니다. 이제 지구인류는 이러한 외부로의 여행에 지칠대로 지쳐 있습니다. 모든 것의 원인이 결코 외부적인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오는 근원지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 모든 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모든 열쇠가 내안에 있습니다. 이제 외부로의 여행을 멈추고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외부로의 여행을 하면서 나의 의식이 끌어들인 모든 것들은 나로 하여금 그러한 체험을 반복하도록 합니다. 그것이 삶이 고해(苦海)가 되는 이유입니다.


이제 누구나 자신을 깊이 되돌아보면서 남이 나를 서운하게 했던 모든 것들을 다 용서해야 합니다. 나도 또한 지난날 남을 많이 아프게 하고 서운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모든 존재를 다 용서해야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마음속에 작은 원망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완전히 풀어내야 진정한 용서입니다. 내가 용서를 못하면 낡은 기운이 나를 따라 다닐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남이 나를 괴롭게 했던 일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나와 남을 분리하려 애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이 우주 속에 분리 같은 것은 없습니다. 분리는 환상입니다. 나와 남은 하나입니다. 나아가 모든 인류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근원의 하나에서 나온 영입니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환상입니다. 사람들은 환상을 실재로 알기 때문에 아직까지 낡은 기운이 사람들의 가슴에서 떠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생이란 나와 남에 대한 원과 한을 모두 풀어주는 것입니다. 두 손을 모아서 가슴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나를 서운하게 했던 사람들을 모두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설령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늘 모든 사람들을 남김없이 용서해야만 합니다. 나에게 맺혀있는 남에 대한 서운함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용서해주세요. 이제 지구 인류는 가해자라는 의식과 피해자라는 의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 합니다. 본래 가해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돌고나며 만들어낸 하나의 환상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가해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더 이상 피해자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본질은 오직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행복과 기쁨입니다.


무한한 이해, 무한한 용서, 무한한 허용, 무한한 사랑, 무한한 풍요, 무한한 행복, 무한한 감사, 무한한 기쁨 그것은 신인류의 의식입니다. 이것은 빛과 사랑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낡은 의식이 아직 진화하지 못한 인류의 가슴속에서 진통하고 있습니다. 낡은 의식은 더 이상 여러분에게 봉사하지 않습니다. 낡은 의식은 모두 낡은 시대의 유산입니다. 이제는 빛과 사랑의 시대입니다. 이제부터 신인류가 가야 할 길은 행복의 길이고 기쁨의 길입니다.



늘 행복하세요. ^^


빛과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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