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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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의 법칙
만도람(念唱하는 語句)을 부르는 것은
최면적인 것으로 그 힘에 의뢰하기 때문에 가기 한정을 일으켜 버린다.
"나는 00상태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
그 순간에 지금까지 존재는 하였으나 인정하지 않았던
여러 가지 선한 상태에 이르는 다른 길이 막혀 버리고
실현에의 길이 다만 하나로 한정하는 일이 된다.
표현 방법을 부단히 확대하여 가는 생명의 존재 방식에 전면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한,
생각 밖의 형을 취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결집하고 있는 일을 강조하고 있는 일 그 자체가
공급하는 것보다 궁핍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바른 표현을 하면 물밀 듯 들어올 질료를 제한하는 듯한 방법으로
그 유입을 막으면 홀연히 神의 무한한 풍요의 안전 실현을 막아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선한 것을 실현하는 우수한 방법은 무엇일가.
그것은 "나는 풍요 그 자체이다"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일이다.
이것은 神(實相) 현현(顯現)의 모든 길을 여는 것으로
역(逆)으로 이것을 닫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에서 神의 존재를 인식하고 일체의 神의 근원과
자아가 의식적으로 일체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우리가 항상 풍성하고 그 풍요에는 아무제한이 없다는 것에 있었다.
"나는 지혜요" "나는 조화이다" 이렇게 몸과 입과 생각으로 표현하고 있으면
신체 에너지도 부활되어 참으로 지혜와 조화가 풍성히 실제 하고 있는 것에
새로이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시종 그렇게 말하고 지내면 에너지도 소모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사람의 인간이 풍요해야할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풍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같은 태도를 취하도록 하고 있으면 한 사람이 풍요하지 않으면
타인도 풍요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다.
만일 자기가 번영하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神의 밀듯한 풍성한 흐름에서 자기 스스로 고립하고
궁핍이란 우상을 세워 놓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는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으나
사실은 한사람 한 사람이 전체 중에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치 중에서만 완전은 있는 것이다.
한사람이라도 밖으로 떨어져 나가면 완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상태와 본래 일체임을 깨닫는다면
그 상태가 외부에 나타나 나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神을 섬기면 일체의 제약 상태에서 해방된다.
누구나 神으로부터 고립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神의 무한한 풍요와의 일체감에 즉각 지금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각 사람이 지금가지 쌓여온 제한감을 타파하기로 결심해야 한다.
자아를 제약에서 해방하기 위하여 취할 수단으로는 극히 확실한 방법이 여러 가지 있다.
무릇 극복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 번영. 풍부는 모든 사람의 것이다.
그 실현을 방해하는 것 중의 최대의 것이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 일이다.
대중들이 예수를 조소하였을 때 예수는 조금이라도 그것에 주의를 하였겠는가?
그들은 무엇인가 어떤 것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악랄하게 획책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예수는 마음을 진정하고 주의 구원을 보라고 말하고 다시 계속하여 인간은 모든 피조물의 주(主)임을 설명하고 "안심하라"고 말하였다.
또 제자들에게 "너희는 자유함을 알라"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의하여 제자들은 낮은 신분이었던 지위에서 제자에 까지 이른 것이다.
예수가 어부들 중에서 제자 한 사람을 택하였을 때 예수는 그를 보통 어부로 보았겠는가.
아니다 "사람을 낚는 자"로서의 제자로 본 것이다.
그래서 "나를 따르라"라 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로 하여금 예수가 되게 한 몸과 입과 뜻에 있어야할
방법에 따르라고 한 것이었다.
예수는 모든 사물을 최대의 겸손으로 행하였다.
그것은 자기 중심주의는 결단코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다.
지금 지구상 전체의 형편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부조화이므로 서로 이웃과 소외하고 사람들은
생존이라는 거대한 경륜(徑輪)에 있어서의
상호 무관계한 개개 별별의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은 한 사람이라도 이 경륜에서 소외될 수 없고
경륜은 의연히 본래의 조화를 계속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분자의 구성에 있어서 원자군의 경우와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체의 완성에 필요한 것이다.
시험적으로 만물이 다 일체라고 말하여 보면 서로가 결코 소외될 수 없고
또 전체로서의 일체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알기 쉬운 말로 인생의 목적은 죽는 일이 아니고
생명의 실상을 더 크게 나타내는 일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대 조화 중에 작동하고 있는 전체라는 원리 중의 한 단위이며,
각 사람들이 그대로 각각의 영역을 소유하면서 완전 조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알기 쉬운 가르침을 잘 음미하여 보면,
예수 자신이 "나는 신이다"라고 선언한 것은
진실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일은 원리를 위한 일부분이 아니고 참으로 원리 그 자체인 것이다.
이제까지의 종교상 교의는 모두 실천이 아니고 이론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그 같은 태도를 되풀이하고 있으면 진리에 대한 이해가
형이하(形而下)적인 방면에만 미치게 되어 영적인 의미는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예수가 기도에 응답에 대한 질문을 받고 기도가 응답이 없는 것은
구하는 방법이 잘못된 까닭이라고 대답하였다.
언제나 단호하게 "구하는 바를 이미 이루었다"는 적극적인 언명을 취한다면
구태여 기도의 말 같은 것은 쓸 필요가 없다.
자기에 있어 필요한 풍족은 이미 실존하고 있다고 심중에 깨닫는 순간
그 순간 그것은 당신의 위에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로부터 이렇다 저렇다는 시사(示唆)같은 것은 불필요한 것이다.
당신은 이미 원리와 완전히 조화하고 있다.
어떤 상태를 생각할 때 당신은 이미 그것과 하나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상태를 명확히 주장하면 되풀이하여 간구 할 필요는 없다.
구하기 전에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구하고 있을 때 나는 듣고 있었다"라고 예수는 말하였다.
다시 계속하여 "말하기 전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도대체 완성하고 있는 상태를 계속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떤 하나의 상태를 왜 여러번 완성한다는 말인가.
이미 자기의 것이 된 것을 구걸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의 위인들의 생애를 더듬어보면
그들이 실상계에서 이미 완성하여 있는 것을
현상계에 나타나기 전에 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잠재의식의 속 깊게 완성의 길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은 일체의 제약감에 시달리지 않고 실상 중에 이미 실존하고 있는 것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神. 즉 전체와의 분리의식이 완전히 없어지면
우리는 원리, 그 자체로서 설 수가 있는 것이다.
결핍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神을 세우면 왜 궁핍하게 되겠는가.
원리라 함은 조화이며 명확한 법칙에 따라 흐르는 것이다.
인간은 이들 법칙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질 의 음 답
문 : 우리는 원한다(want)는 말속에는 "결핍하고 있다"는 뜻도 있어, 말 이외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물건을 원한다는 인습에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당신(저자 : 스폴딩)은 말하고 있는 것인가.
답 : 그렇다. 처음 출발에 바른 길로 간다해도 어떻든 의혹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할 것 없이 계속하여 나가면 의혹이나 공포는 극복되는 것이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 실상의 세계에서 이미 성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생각할 리가 없는 것이다.
문 : 다시 말하면 성취를 구하라. 이미 성취하였다고 알라. 그리하여 그와 같은 모습을 마음에 그리라고 하는 것인가.
답 : 참으로 그렇다. 神의 마음이 해결해준다고 생각하게 되면 여러 가지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의 나를 내세우면 자아 이외의 길은 전부 막혀버린다. 자아는 과오를 범한다. 그러나 신의 마음은 결코 과오를 범하지 않는다.
문 : 우리가 어떤 것을 구하고자 대사(大師)들과 같이 두 손을 내밀어도 손바닥에는 구하고자 하는 것이 들어오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