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


피라미드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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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라미드의 수수께끼


과연 고대의 이집트인이 직접 만든 축조물이냐 하는 점에서부터도 의문은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 피라미드는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기원 전 28세기에 이집트를 통치한 쿠프 왕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일반인들이 알고 있지만 이것은 쿠프 왕의 장식물이 피라미드 내부의 왕실 위에 있는 5개의 방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할 뿐이며 사실은 기원 전 3만6천 년경에 전설적인 아틀란티스의 토트라는 사람에 의해 축조되었으며 이 피라미드 축조 기술은 이미 전설 속의 시리우스 문명권에서 사용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기자 피라미드 군이 오리온 별자리의 3개의 별들과 동일하게 배치되었다는 이론이 제기되면서 더욱 외계인이 건설하였다는 점이 설득력을 갖게 한다. 즉, 외계인들이 자신의 별에서 피라미드를 사용하였고 그 기술대로 지구에 건설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외계인들이 축조할 당시에는 지구가 빙하기였고 지금의 이집트 주변만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축조했기 때문이고 그 후에 이 대 피라미드를 모방해서 다른 지역에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주장도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피라미드의 신비한 에너지는 바로 이 대 피라미드의 형태에서 더욱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피라미드는 무슨 목적으로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것은 외계인인 시리우스 문명권에서 만들었을 경우와는 목적 자체가 다르겠지만 시리우스 문명권의 외계인이 만들었다면 차후에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에 다시 오기 위한 하나의 표적이나 자신들의 물품을 지하에 보관하기 위해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고 이 피라미드를 해체해서 구석구석 확인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피라미드 지하나 내부가 막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알 수 없는 공간에 그들이 사용했던 발달된 기계나 기구 등이 그대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기술로는 알 수 없지만 이 막힌 공간을 손쉽게 열 수 있는 방법 역시 그들이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쿠프 왕이 건설했다면 쿠프 왕이 건설할 당시는 예수가 태어나기 약 2.900년 전이었으며 이집트 파라오(국왕)는 한층 더 위대한 태양신에게 보내지게 하기 위해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태양과의 거리가 지상보다 훨씬 가까운 위치로 위대한 신께 국왕을 보낸다. 즉, 죽은 국왕을 승천시켜 태양신에게 조금이라도 빠르게, 정확히 가깝게 보내기 위해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는 것이며 그리고 정치적 권력의 상징으로 만들었다는 설이 유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는 것이다. 250만 개 이상의 돌을 쌓아서 만든다면 수십만 명의 인력이 20년이 넘게 걸려야 겨우 만들 수 있고, 단순히 쌓아서 만든다면 높이가 144.6m인 이 거대한 석조물을 어떻게 쌓아 올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영국의 월리엄 델라 교수는 "물체를 낙하시키면 중력에 의해 지면으로 떨어진다는 법칙과 반대로 부상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말한다.

물리적인 힘과 상관없이 공중으로 부상시켰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 또한 설득력이 약하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집트인이 만들었다면 이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서 수십만 명의 노예와 노무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노예들이 있었다면 잘 훈련된 군대와 일부 성직자, 그리고 농부, 공무원들과 황실 관리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건축 연대를 약 B.C. 3000년경으로 추정한다면 그 당시에는 나일강 주변의 비옥한 농지는 삼각주뿐이였는데 이 나일강 주변의 농산물로 이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한 가지 가능성이 있는 대답은 그들이 나무로 된 굴림대를 따라서 밀어가거나 나무로 된 선로 위로 돌을 단지 미끄러뜨렸다면 가능할 수 있다.


이런 목재를 얻기 위해 그들은 이런 목재들을 어디선가 가져와야 할 것이다. 이곳의 목재의 대부분은 대추야자나무로 태양빛이 강렬한 그런 나라에서 필요한 그늘을 제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식량원인 그것을 잘라낸다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그래서 이 나무를 이용했다는 점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목재 굴림대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선로를 따라돌을 끌고 왔거나 끌어당겼을 가능성도 있다. 상형문자로 그려진 것에서 돌에 밧줄을 묶고 수백 명의 사람이 이것을 당기고 있고, 한 남자가 돌 위에 서서 사람들이 일치하여 돌을 끌 수 있도록 독려하는 그림은 가끔 발견된다. 그렇다면 각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에는 적어도 1m정도의 일할 수 있는 공간은 필요하다. 약 천 명의 사람들이 이 로프에 매달려 있다고 가정해보면 이 사람들의 총 길이는 약 1,000m의 길이가 된다. 이런 상태로 작업의 통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시의 인구를 고려해보아도 단순 노동력으로는 그런 대규모 공사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인력만으로 작업을 할 때에 그들을 먹이고, 잠재우고 하면서 건설해야 하는 문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해진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수백 명의 인력을 대체할 수 있는 기계 장치의 도움 없이는 피라미드 건설이 무리일 수밖에 없다.


덴마크의 토목공학자인 가드 헨슨(P.Garde Hanson)은 덴마크 공학학회에서 발간된 책자에서 당시에 순전히 인력을 이용해서 대 피라미드 공사를 했다고 가정하고, 엔지니어의 입장에서 그 공정을 면밀하게 분석해보았다.


그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이 그 보고서를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런 공사를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키루스 2세, 알렉산더 대왕을 합쳐 놓은 천재에 의해 조직된 군대가 투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외계인과 교신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박주원 씨가 쓴 「외계인과의 교신기록」이라는 책에서 피라미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이 외계인과 교신을 해서 지구의 몇 가지 비밀을 알아내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피라미드는 당시의 학자가 외계인과 우연한 기회에 대화를 나누게 되고 그 외계인의 행성에 가서 피라미드, 축조 기술을 배워서 지구로 되돌아와서 피라미드를 촉조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돌을 외계인들이 어딘가에서 날라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 축조 기술은 아래에서 쌓아서 위로 올라가는 방식이 아닌 위에서 아래로 쌓는 방법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먼저 피라미드 건설할 위치를 선정한 다음 밑변의 네 귀퉁이에 레이저를 쏠 수 있도록 기계를 장치한다. 그러고 나서 네 귀퉁이로부터 공중의 한 꼭지점을 향해 레이저를 쏘게 되는데 이는 레이저를 통해 건축물의 틀을 잡는 것이다. 그 다음 맨 꼭대기 꼭지점부터 돌을 쌓아 아래로 내려간다. 이 때 쌓은 돌을 고정시켜 주는 것은 네 귀퉁이에서 쏘아지는 레이저 판이다. 돌 아래를 책받침처럼 레이저판이 받치고 있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다. 맨 위 꼭지점을 제외한 나머지 돌들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내려왔거나 아래에서 위로 쌓아 놀려졌다는 것이다. 상기와 같은 방법은 외계인에 의한 방법이고 기자의 피라미드를 제외한 나머지 피라미드는 모두 사람들이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아래로부터 위로 쌓아 올렸다.


작은 돌들을 쌓아 하나로 만들었는데 돌덩어리가 10톤이라면, 벽돌 쌓듯이 그 당시에 외계인에게서 배운 기술을 이용해서 특수한 모르타르를 만들어 발라가면서 작은 돌 100개 정도를 먼저 쌓아 올렸다. 그리고 미장하듯이 그 외부를 또다시 특수모르타를 발랐다.


하나의 돌처럼 되어버리는 특성이 있는 모르타르이기 때문에 마치 하나의 돌처럼 보이게 되며 면도칼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빈틈없이 접착되는 특수한 모르타를 만드는 것이 기술이었다. 단지 추측만 할 뿐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축조 방법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여전히 세계 7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축조물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피라미드 내부는 회교도들에게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맨 처음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간 인물은 9세기경 칼리드 아리아문이라고 한다. 그는 꼭 닫혀진 입구를 발견했는데 어떻게 하든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돌을 조금씩 파고 들어가 피라미드 내부에 들어갔다. 돌을 불로 달구고 산을 부어 약하게 된 곳을 부수어 들어가는 방법을 취했는데 그 때 무언가 무거운 것이 멀리서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따라 방향을 정해 더욱 파고 들어갔는데 결국 그는 왕의 관이 놓인 방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방은 빈 껍데기인 미완성이었고 거기서 되돌아 나오기 위해 지진에 의해 삐뚤어진 돌 사이를 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피라미드의 독특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널따란 46.6m가 되는 경사 26°의 긴 복도였다. 벽은 8.5m이고 잘 연마된 석회담으로 받혀져 있었다. 그 정점에서 안으로 들어가니 일ㄹ반인들에게 왕묘로 알려진 곳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왕의 묘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곳이 왕이 묻힌 곳일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 칼리드 아리아문 일행이 발견한 왕의 묘실은 통풍구, 그리고 5개의 기둥이 각각 중량 70톤을 받치고 있는 사실도 대단한 것이다. 5천 년 전에 정말 인간에 의해 축조되었다면 현대의 과학기술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정확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미 설명했다시피 피라미드 아래의 한 변의 길이가 230.34m이고 네 변의 합계가 931.392m이고 이것의 높이 146.6m로 나누면 원주율π(3.141596...)의 정확히 두 배인 6.285...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그냥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피라미드는 기저부의 방위가 동서와 남부 축에 의해 정확하게 0.065°로 맞아 있고, 정확한 기하학적 건물이며 피라미드 정점의 중심이기도 하다. 19세기의 대표적인 고고학자로 이집트학의 선구자였던 플린디스피트리 경(Sir Flinders Petrie)은 그가 직접 측정해보고서 기자 피라미드에 적용된 정밀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쿠프 왕의 피라미드로 추정되는 대 피라미드는 밑변의 길이 230.34m에 대해서 겨우 1.52㎝의 오차만 내었을 뿐이다. 이것은 1/15,000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모서리는 직각에서 각도 12′의 오차만 있을 뿐이다. 낮 동안의 온도 변화에 의해서 자의 길이 번화는 이보다 더 큰 오차를 낼 수도 있다. 수평과 돌을 다듬어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데 적용된 정밀도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180㎝ 길이에 달하는 접합 면은 직선에서 0.25㎜ 정도만 벗어난다.


카프리 왕의 피라미드는 이보다 3배 정도 오차가 커서 밑변 길이 215.265m에 대해 3.81㎝를 벗어나고 모서리가 직각에 대해서 33′ 벗어나 있다. 멘카우라 왕의 피라미드 경우는 이보다 더 심해서 각각 105.512m에 대해 7.62㎝, 직각에 대해 1′50″벗어나 있다.

이 이후의 시대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이 초기 왕조의 건축물에 비견한 만큼 정밀하게 건축된 건물은 없다."


피트리 경은 남아 있는 몇 장의 외장재를 측량해보고 180㎝가 넘는 길이를 측정한 결과 직선에서 겨우 0.25㎜ 정도의 오차만 있을 정도로 정밀하게 가공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이런 외장재들이 서로 붙어 있는 틈새 사이에는 매우 고운 모르타르가 발려져 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기술인데 외장재 접합부의 면적은 대략 2.4m ×1.5m인데 이렇게 넓은 면적에 0.5㎜ 두께로 고르게 깔 수 있는 기술을 가진 미장 전문가가 현재에도 없다. 우주왕복선에 사용된 스페이스 셔틀의 표면에 붙이는 내화 타일간의 간격도 0.5㎜보다는 크다.


그리고 15톤 이상 되는 외장재를 그 높은 곳에서 제자리에 올려놓은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정밀한 두께의 모르타르로 이음매를 처리하면서 한두 개의 돌도 아닌 데도 그렇게 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힘들다. 피라미드 밑변의 네 모서리는 직각에 가깝다. 최근에 측정한 바에의하면 밑변의 남동쪽 모서리는 89°56′27″, 북동쪽 모서리는 90°3′2″, 남서쪽 모서리는 90°0′33″,북서쪽 모서리는 89°59′58″로서 90°에 대해서 최대 오차는 0.07% 이내이다. 또한 방향을 보면 네 밑변이 각각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우선 북쪽 면은 2′28″서쪽으로 돌아가 있고, 남쪽 면은 1′57″서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동쪽 면은 5′30″북쪽으로, 서쪽 면은 2′30′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방향에 따른 오차는 0.015%로 어긋난 최대 면으로 따지면 1.1m에 해당된다. 이 정도로 정밀한 각도와 방향으로 건축할 수 있었을까?


밑변과 방위를 잘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건물 전체의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는 대각선 측량이 불가능했다. 돌출된 암석이 측량을 위한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각 면은 뒤틀림없이 정확하게 사각뿔의 중앙으로 모이도록 건축되는 상당히 어려운 기술인 것이다.


오늘날 모서리가 직각에 가깝고, 그 방위가 가장 정확해야 하는 건물은 천문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저너세계 시간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의 자오선 빌딩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이 건물 중앙의 정남북을 잇는 선인 자오선이 바로 경도가 0°이기 때문에 이 건물의 남북 방이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 피라미드는 남북 방위가 고작 3′정도 어긋나 있는데 비해 이 건물은 자오선에 대해서 9′이나 기울어서 지어졌다. 미루어 짐작하면 현대의 건축물에 사용하는 측량 장비보다 더 정밀한 측량 장비가 이미 5,000여 년 전에 사용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늘날 지어지는 건축물의 허용공차가 1% 정도 적용된다. 건축을 함에 있어서 너무 지나친 정밀도를 요구할 경우에 비용과 시간,노력 면에서 엄청난 투자가 들어갈 뿐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별다른 효용가치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피라미드는 무덤이라기보다는 천문대보다 더 정확성이 요구되는 건축물이었거나 아니면 당시의 건축기술이 그 정도로 발전된 수준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존 로머(John Romer)는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대 피라미드에 대해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실제로 피라미드는 현재까지 지어진 세계의 모든 건물 중에서 가장 정밀한 건물이라는 것이다.


저변으로부터 3분의 1 지점에 어떤 연유로 왕의 관이 놓여지게 되었으며,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피라미드는 과연 무덤인가에 대한 의문은 역시 남는다.


폴 브런튼은 「이집트의 신비」라는 그의 책에서 대 피라미드가 무덤이 아니라는 몇 가지 강력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일부 무덤으로 추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로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여기의 이교도 왕의 무덤이 비어 있고, 관의 뚜껑도 없으며,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상자가 왕의 방이 있는 층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왕의 석관이라고 당시의 이집트 학자들은 말하고 있지만 이 관의 면에는 보통의 상투적인 본문이나 종교적인 해석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거기에는 단 한자의 단어나 상형문자도 보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다른 모든 관들은 그것의 용도를 나타내기 위해 글이 써져 있거나 기념할 만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만일 이것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이집트 왕의 무덤이 확실하다면 왜 여기에는 그것이 없는 것이냐는 것이다.


둘째, 이 관의 천장으로는 200피트 이상의 구멍이 나 있는데 이는 외부의 공기를 접촉하려는 공기 통로로 보인다. 이러한 공기 통로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미라에게는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지 않고 반면에 노동자들도 그것에 뚜껑을 덮고 나면 다시 그곳에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는 데도 말이다. 이것은 왕족의 묘로 만들어진 이집트의 어떠한 건축물에서 이런 공기 구멍을 가지고 있는 방을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셋째, 다른 이집트인들은 실제적으로 매장을 위하여서는 지표면 보다 낮은 곳에 돌을 잘라내고 둥근 매장용 구덩이를 팠다. 이러한때에 이 관으로 추정되는 것은 왜 지표면으로부터 150피트나 올라온 공간 속에 있는 것일까? 사실상 즉은 자를 땅 밑이나 땅 바로 위에 두는 것이 과거에나 지금도 전 세계적인 관습이다.


넷째, 왕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 왜 대회랑 같은 넓은 공간이 그렇게 높은 곳에 지어졌을까?

그리고 거의 30피트의 높이로 만들어졌을까? 단지 4피트의 높이 위로 통하는 통로들만으로도 동일하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대 회랑 자체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노동력도 덜 들이고 그 일을 마칠 수 있었는데도,


다섯째, 왜 두 번째 방은 소위 여왕의 방으로 불리는 첫 번째 방에 그러허게 가까이 있는 것일까? 파라오[이집트 왕의 칭호]는 결코 자신의 곁에 여왕들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미라에게는 두 개의 무덤이 필요치 않다. 왕비의 방에는 이집트인 무덤으로서 대화하고 있는 벽 그림들과 묘비가 있다. 그것의 존재로 곁방을 FWJD당화하고 있는데 이것은 텅빈 것이고 왕의 방이라는 장식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왜 공기 구멍을 설치하였다가 그것이 발견되기 전에 막아버렸을까? 왜 이 피라미드를 건축했던 자들은 이 두 개의 무덤에 그 어려움을 겪으면서 환기구를 만들려고 했을까? 즉은 자는 숨쉬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데도 말이다. 이 환기구에서 다시 한 번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는데 1837년 대 피라미드를 탐사하던 하워드 비제(Howard Vyse)는 그의 조수에게 화약을 사용해서 환기구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라고 시켰다. 그러자 그 안에서 가로 1피트9약 30,48㎝), 세로가 4인치(약 10,16㎝) 두께 1/8인치(약 3.2㎜)인 철제판이 발견되었다.


이 철판은 환기구 구멍에 막혀 있는 문의 일부가 폭발로 떨어져 나온 것으로 판명되었다. 1881년 이 철판을 조사하던 플린더스 피트리 경은 철판 표면에 생긴 녹에 화석화된 원생 생물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똑같은 화석을 함유하고 잇는 석회암과 그 철판이 대 피라미드가 건설했을 당시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트리 경은 이미 이집트 구왕국 초기에 철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하는데 최소한 이집트 구왕국 6왕조 때부터라는 주장이다. 이 6왕조는 기원 전 2200년경으로 기원 전 1500년경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히타이트족보다 무려 700년이나 앞섰다는 것이 된다.


이 철판을 분석한 결과 그것은 채광되어 정련된 철이지 운석 등에서 얻은 것이 아님이 밝혀졌다. 1989년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자원학과 존소(M.P.Jones) 박사와 세이드 엘 게이(Sayed 띠 Gayer) 박사의 조사 결과 그 철판이 주석을 매우 적게 함유했기 때문에 운석에서 나온 철이 아니라고 판정했다. 이들의 실험결과 그 철판은 1,000℃ 이상에서 녹았다. 피트리의 놀 리가 맞다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선사시대부터 철을 사용했다는 것이 되는 셈이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1989년의 정밀 분석에서 철판의 한쪽 면에 금이 도금되어 잇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전기 도금과 아연 도금은 1800년 경 이탈리아의 볼타가 전지를 발명한 이후에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는 금을 수은에 녹여 아말감을 만들어 금속 표면에 입힌 다음 열을 가해 수은을 증발시켜 금만 남기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럴 경우 금박의 두께가 두껍고 균일하지도 않다. 독일인 아르네 에게브게트(Arne Eggebrecht)는 고대 이집트의 여러 조각상에 입혀진 금 도금의 두께가 얇고, 그 표면의 두께가 매우 고르다는 사실로부터 혹시 전기 도금법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다른 방법은 그런 형태의 도금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환기구에서 나온 철판의 금 도금도 전기 도금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그렇다면 렐레니즘시대(B.C. 약 300년경)에 바그다드 근처에서 사용되던 전지와 비슷한 종류가 그 시대로부터 무려 2,000년 전부터 사용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철과 전기를 사용했다면 현재 석재를 가공할 때 사용하는 전기를 이나 석재의 표면을 매끈하게 갈아내는 회전식 물갈기 공구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피라미드 내부에서 발견된 석관은 피트리 경에 의하면 이 석관의 외부체적이 2.332.8ι로서 정확히 외부 체적의 2배임을 확인하고는 고도의 정밀도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 정도의 정밀도로 가공하는 데는 어떤 도구가 사용되었다는 것인가. 크리스토퍼 던(Christopher P.Duun)이라는 공구 제작자는 그의 <고대 이집트의 진보된 기계 가공술>이라는 논문에서 '왕의 방'에서 사용된 43개의 들보를 다듬은 기술을 검토하고 나서 "비록 고대 이집트 시대에 어떤 기구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화강암 들보에 나 있는 기계자국은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들은 아마도 직선톱과 둥근 톱, 드릴과 같은 오늘날 사용하고 잇는 장비와 유사한 것을 사용했음이 틀림없다."라고 주장했다. 시대적인 관점으로 보면 청동기 시대에 단단한 서거재를 가공할 수 있는 것이 가능했겠느냐 하는 점이며 더욱이 이 석관은 평평한 석재를 짜맞춘 것이 아니라 내부를 정교하게 파내어서 만들고 화강암 표면을 물을 뿌리면서 갈아내어 매끈하게 하는 현대의 기법처럼 윤기나게 만든 기술은 시대적인 관저머에서만의 섣부른 추정은 상당한 혼란을 야기한다. 조세르의 피라미드 양옆으로 5기 왕조의 첫 번째 왕인 우제르카프와 마지막 왕인 우나스 왕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이 피라미드들은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제3 왕조에서 제5 왕조까지의 세월은 불과 300년 정도인데 4왕조의 대 피라미드에서 보여주는 완벽한 건축기술이 갑자기 보잘 것 없는 수준으로 전락해벼렸다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역사란 연속성이 있기 마련인데 시대적이고 연대적인 분류에 땨르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너무나 많다. 4왕조의 피라미드와 5왕조의 피라미드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또다른 변화가 존재한 것임에 틀림없다. 즉, 4왕조 피라미드 축조기 술은 분명히 5왕조 피라미드와 다른 무언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 가면 사카라 고분에서 출토된 돌 항아리가 많이 진열되어 있다. 그 당시 약 3만 점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의 돌항아리는 좌우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형태로 제작되어 있다. 단단한 암석을 대칭 상태로 둥글게 깎은 후에 그 속을 파내서 겨우 5㎜정도의 두께로 항아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뿐 더더 더구나 시대적인 연대로 추정하면 그것을 만든 시기는 구석기 시대인데 어떻게 그렇게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인가. 이미 1만 년 전의 사람들은 선반과 같은 기계를 이용해서 깎아 만들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영국 런던대학의 이집트학 교수였던 울터 에머리(Walter B.Emery)는 고대 이집트의 돌 항아리들이 고도의 정밀도로 다양한 형태를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 낼수 있는 기술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아직 우리는 이런 석기 그릇들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만족스런 설명을 할 수 없다. 그리고 비록 몇몇 과정에 대해 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다른 과정은 완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어떻게 밑이 얕은 그릇이나 접시 둘레에 손가락을 대고 돌려보았을 때 완벽한 원이 아니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최고의 정밀도를 달성한 것일까?


어떻게 수정으로 관상의 항아리를 만들면서 그 두께가 1㎜가 안 되도록 깎아 만들 수 있을까? 비록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당시의 기술자들이 고정된 공구에 대해서 가공물을 회전하도록 하는 선반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많은 횟수를 반복하고 세심한 노력을 들여서 한다 하더라도 손으로 수가공에 의해 그 정도의 정밀도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피라미드의 표면은 현재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고 한다. 기자의 제2 피라미드 상부에 외장재가 일부 남아 있지만 최초에는 태양빛 아래에서는 빛을 발하고 그 광선을 반사하면 달에서도 그 빛을 볼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피라미드 한 개당 그 위에 매끄럽게 가공된 석회암 1만5천여 개로 구성된 외벽이 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부드럽고, 잘 닦여진 석회암으로 쌓여 네 면에 걸쳐 22에이커(약 89.029.6㎡)의 돌들은 주변의 수만 마일을 비출 수 있는 횃불처럼 그 아름다운 자태를 반사하는 거대한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 외장이 얼마나 정교했던지 돌과 돌 사이의 틈새는 면도 칼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외부의 피라미드 케이스 역할을 하는 돌들은 밀도가 높고 하얀 대리석과 같은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단단해지고 윤기가 나는 것이었다. 이런 돌들은 맞추었을 때 정확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오늘날 안경재료로도 사용 가능한 것들이다. 이런 돌들은 높이가 5피트(152.4㎝)이고 길이는 12피트(365.76㎝)이며 각각의 무게는 16∼20톤 정도이다. 각 35평방 피트(3.25㎡)의 면적에 대한 이음매는 알루미늄 호일 한 장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이 매끈한 표면에는 하얀 시멘트와 같은 막이 종이처럼 얇게 씌워졌다.


오늘날의 화학자들도 여전히 이 뛰어난 시멘트의 구성성분을 완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으며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이집트 연구가인 W.M. 플린더스 페트리 경은 이 케이스 역할을 하는 돌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이음매의 평균 두께는 14분의 1인치(약 1.8㎜)정도이다. 직선 방향이나 정방형에서 잘려진 것의 평균오차는 표면 길이 75인치(약 1.905㎜) 중에서 단지 100분의 1인치도 되지 않는다. 그가 누구였던지간에 석공이 그 정도의 오차 범위 내에서 그렇게 훌륭하게 작업했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16∼20톤에 달하는 돌을 옮겨서 그것을 꿰맞춘 일을 상상할 수 있다.


이것처럼 정확성을 가지고 오늘날 다시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과 더욱이 그 각 돌을 끼우는 것이 144,000번 이상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던 것이 지난 14세기초 카이로에 대지진이 일어나 모든 건물이 폐허로 변했지만 피라미드는 조금의 피해도 없었고, 시민들이 지진에 대한 재해 복구를 하기 위해 피라미드 외장재를 벗겨내어 쓰는 바람에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건물들이 모두 폐허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끄덕 없이 버텨낸 것을 보면 이 대 피라미드에 적용된 고도의 건축공학적 기술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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