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순수 잠재력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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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성공을 부르는 일곱 가지 마음의 법칙'을 살펴보고, 그 법칙들을 어떻게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1. 순수 잠재력의 법칙 (The Law of Pure Potentiality)
성공을 부르는 일곱 가지 마음의 법칙 중 첫 번째는 '순수 잠재력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우리 인간 본연의 상태가 순수의식이라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순수의식은 순수 잠재력이며, 온갖 가능성과 무한한 창조력의 장(場)이다. 순수의식은 우리 정신의 본질이다. 그것은 또한 끝간데 없고 매인데 없는 순수한 기쁨이기도 하다. 의식은 다른 속성들은 순수한 앎, 무한한 침묵, 완벽한 균형, 무찌를 수 없는 강인함, 단순성, 그리고 환희이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며, 우리의 본성은 순수 잠재력의 본성이다.
당신이 스스로의 본성을 발견하고 스스로가 진정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 그 앎 자체 안에 어떤 꿈이든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영원한 가능성이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모든 것의 한량없는 잠재 상태이기 때문이다. 순수 잠재력의 법칙은 또한 '하나됨(unity)'의 법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삶의 무한한 다양성 밑바닥에는 모든 것을 꿰뚫는 정신의 하나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과 이 에너지의 장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순수 잠재력의 장은 바로 당신 자신의 참자아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스스로의 진정한 본성을 체험하면 할수록 당신은 순수 잠재력의 장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참자아를 체험하는 것, 다른 말로 '자기조회(self-referral)'는 마음속의 기준점이 우리 자신의 정신이지, 우리 경험의 대상들이 아님을 뜻한다. 자기조회의 반대 개념은 '대상조회(object-referral)'이다. 대상조회를 하게 되면 우리는 항상 참자아 밖에 있는 대상들, 즉 상황, 사정, 사람, 사물들의 영향을 받는다. 대상조회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계속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 생각과 행동은 언제나 어떤 응답을 미리 내다보고 있고, 그러므로 두려움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대상조회를 하게 되면 우리는 사물을 통제해야겠다는 욕구를 느낀다. 다시 말해 밖으로 드러나는 힘이 필요하다고 강렬하게 느끼는 것이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 사물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욕구, 밖으로 드러나는 힘을 갖고 싶어하는 욕구… 이 욕구들은 모두 그 바탕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욕구들이다. 이러한 종류의 힘은 순수 잠재력의 힘이나 참자아의 힘, 또는 '진정한' 힘이 아니다. 우리가 참자아의 힘을 체험하게 되면 두려움이란 있을 수 없고, 무엇을 통제하려는 강박관념도 없게 되고, 다른 사람의 승인이나 밖으로 드러나는 힘을 얻고자 하는 투쟁도 있을 수 없다.
대상조회를 할 때는 당신의 거짓자아가 마음속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거짓자아는 당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거짓자아는 당신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요, 당신의 사회적 가면이며, 당신이 연기하고 있는 역할이다. 당신의 사회적 가면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통제하고자 하며, 두려움 속에서 살기 때문에 힘에 의해 유지된다.
반면, 당신의 참된 자기인 참자아는 당신의 정신이며 혼이다. 그것은 앞에 말한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참자아는 비판에 대해 면역이 되어 있으며, 어떠한 도전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누구에게도 우월감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도 모두 나와 같은 참자아임을, 겉모습은 다르지만 같은 정신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상조회와 자기조회 사이의 본질적 차이이다. 자기조회를 하게 되면 어떤 도전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이를 존중하며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는 당신의 진정한 존재를 체험하게 된다. '자기 힘(self-power)'은 그러므로 참된 힘이다.
그러나 대상조회에 기반을 둔 힘은 거짓 힘이다. 이 힘은 거짓자아에 기반을 둔 힘이기 때문에 조회 대상이 있는 한에서만 지속된다. 당신이 만일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거나 한 회사의 사장이라는 그럴 듯한 직함을 갖고 있다면, 혹은 돈이 아주 많다면, 당신이 누리는 힘은 그 직함이나 직업이나 돈과 함께 간다. 거짓자아에 기반을 둔 힘은 그러한 것들이 계속되는 한에서만 지속된다. 즉, 직함, 직업, 돈이 사라지고 나면 힘도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힘'은 영원하다. 참자아에 대한 앎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힘'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자기힘'은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끌어당기며, 당신이 원하는 사물을 당신에게로 끌어당긴다. 그러면 사람, 상황, 사물들이 자석처럼 끌려와 당신의 욕망을 뒷받침해 주게 된다. 이는 또한 자연법칙이 뒷받침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법칙의 뒷받침이란 신의 뒷받침이며 은총 상태에 있는 존재로부터 오는 뒷받침이다. 그러면 당신의 힘은 충실해져서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돈독한 유대감을 즐기게 되고, 다른 사람들 또한 당신과의 관계에 있어 돈독한 유대감을 즐기게 된다. 당신의 힘을 바로 그 참다운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연대관계의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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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모든 가능성이 펼쳐지는 장인 '순수 잠재력의 법칙'을 어떻게 구체적인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 당신이 순수 잠재력의 장에서 이익을 취하고 싶다면, 그래서 순수의식에 숨어 있는 창조력을 충분히 활용하고 싶다면 당신은 그 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에 들어가는 방법 중 하나가 침묵, 명상, 비판단(non-judgment)을 매일 실천하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이 장에 숨어 있는 특질인 무한한 창조성, 자유, 환희에 도달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침묵을 실천한다는 것은 일정 시간을 단지 '존재하기'에 할애한다는 뜻이다. 또한 침묵을 체험한다는 것은 말하는 행위를 의식적으로 멀리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텔레비전 보기, 라디오 듣기, 책 읽기 등의 행위를 의식적으로 멀리한다는 의미도 된다. 당신이 침묵을 체험할 기회를 스스로에게 한 번도 주지 않는다면, 당신 마음속의 대화에는 혼란이 생길 것이다.
가끔씩 조금이라도 시간을 따로 내어 침묵을 체험하라. 아니면 하루에 다만 얼마 동안만이라도 침묵을 지키기로 스스로 다짐해 보라. 두 시간도 좋고, 그것이 너무 길다면 한 시간도 좋다. 그리고 가끔씩은 하루 온종일, 아니면 이틀, 한 주 내내, 이런 식으로 점점 더 긴 시간을 들여 침묵을 체험해 보라.
당신이 이러한 침묵의 체험 속으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 우선은 당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대화가 더욱 더 혼란스러워진다. 당신은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긴 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기로 굳게 결심하고 나서 첫날이나 둘째 날 완전히 미칠 지경이 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절박한 느낌과 불안이 갑자기 그들을 덮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침묵을 체험하고 있는 동안 그들 마음속의 대화는 이내 잠잠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침묵이 깊어진다. 왜냐하면 잠시 후 마음이 단념하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 즉 참자아, 정신, 선택의 주체가 말하지 않을 작정을 했다면 다른 곳으로 공연히 빙빙 돌아 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을 마음이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속의 대화가 잠잠해지면서 당신은 순수 잠재력의 장이 지닌 고요함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각자 편한 방식대로 정기적으로 침묵을 실천하는 것이 '순수 잠재력의 법칙'을 체험하는 한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매일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하자면 적어도 아침에 30분, 저녁에 30분 정도 명상해야 한다. 명상을 통해 당신은 순수한 침묵과 순수한 앎의 장을 체험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 순수 침묵의 장 안에 무한한 조직력의 장이 있다.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뗄 수 없이 연관되는 창조의 마지막 단계가 있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뒤에 나올 다섯 번째 법칙인 '의도와 열망의 법칙'에서 당신은 의도의 미약한 충동을 이 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법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당신의 열망은 저절로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선 고요함을 체험해야 한다. 고요함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사항이다. 왜냐하면 끝없이 많은 세부사항들을 당신만을 위해 알맞게 편성해 줄 수 있는 순수 잠재력의 장과 당신을 이어주는 끈이 바로 이 고요함이기 때문이다.
잔잔한 연못에 작은 돌을 던지고 그 돌이 잔물결을 일으키는 것을 바라본다고 상상해 보자. 잠시 후 돌이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아마 당신은 돌을 또 하나 던질 것이다. 순수 침묵의 장속으로 들어가 당신의 의도를 입력할 때도 바로 그렇게 하면 된다. 이 침묵 중에, 가장 미약한 의도만 있어도 그 의도는 모든 것을 모든 것과 이어주는 우주의 보편적 의식의 밑바닥을 가로지르며 잔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의식 속에서 고요함을 체험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마음이 출렁이는 대양과 같다면, 설령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그 안에 던져 넣는다 해도 아무 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성서에 이런 표현이 있다. '고요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 이런 경지는 오직 명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순수 가능성의 장에 도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비판단의 실천이다. 여기에서 판단이란 사물을 옳고 그름, 선과 악으로 끊임없이 가치매김하는 것을 뜻한다. 계속 가치를 판단하고, 분류하고, 딱지를 붙이고, 분석한다면 당신은 마음속의 대화에 많은 혼란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렇게 혼란이 생기면 당신과 순수 잠재력의 장 사이의 에너지 흐름은 막혀 버린다. 당신은 생각과 생각 사이의 틈새를 그야말로 꽉 막아버리는 셈이다.
틈새는 순수 잠재력의 장과 당신 사이의 연결이다. 그것은 순수한 앎의 상태이며, 생각과 생각 사이의 조용한 공간이며, 당신을 진정한 힘에 이어주는 내적 고요함이다. 그 틈새를 막아버리면 당신은 순수 잠재력의 장과 무한한 창조력에 다다를 수 있는 끈을 없애버리는 셈이 된다.
<기적의 코스(A Course in Miracles)>라는 책에 이런 기도가 나온다. '나는 오늘 일어나는 어떤 일도 판단하지 않으렵니다.' 판단하지 않으면 마음속에 고요함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당신의 하루를 그러한 다짐으로 시작하려는 것은 좋은 생각이다. 하루 종일, 당신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판단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마다 이 다짐을 생각하라. 하루 종일 이 과정을 실천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된다면,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은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겠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은 비 판단을 체험해 보겠다.' 그렇게 하면 그것을 차츰차츰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침묵을 통해, 명상을 통해, 또 비 판단을 통해 당신은 첫 번째 법칙인 '순수 잠재력의 법칙'을 지킬 수 있다. 일단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이 실천에 네 번째 요소를 덧 불일 수 있다. 그것은 '규칙적으로, 시간을 들여 자연과 직접 사귀어 보는 일'이다.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면 당신은 삶의 모든 요소들과 힘들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느끼게 되고, 삶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시냇물이든, 숲이든, 산이든, 호수든, 해변이든 관계없이 자연의 지성과 그렇게 이어지면 순수 잠재력의 장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 존재 안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참된 본질과 접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참된 본질은 거짓자아 너머에 있다. 그것은 두려움이 없고, 자유로우며, 비판에 대해 면역되어 있고, 어떠한 도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보다 열등하지도 우월하지도 않으며, 마술과 신비와 매혹이 가득하다.
당신의 참된 본질에 도달하면 당신은 관계의 거울을 통해 통찰력을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관계는 결국 당신이 당신 자신과 맺는 관계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죄의식, 두려움, 돈이나 성공에 대한 불안 또는 그 밖의 어떤 문제에 대해 불안감을 갖는다면 이는 당신이 지닌 인성의 바탕을 이루는 죄의식, 두려움, 불안을 반영하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성공을 했다 해도 존재의 이 기초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참된 치유는 오직 자기 자신과 가까워짐으로써만 이루어진다. 당신이 당신의 진정한 자아에 대한 앎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 다시 말해 당신의 진정한 본성을 진실로 이해했을 때 당신은 절대로 죄의식이나 두려움, 또는 돈이나 풍요나 소원성취에 대한 불안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모든 물질적 부의 본질이 생의 에너지요, 그것이 순수 잠재력임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 잠재력은 당신 안에 깃든 본성이다.
점차 참된 본성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서 당신은 저절로 창조적 사고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순수 잠재력의 장은 또한 무한한 창조력과 순수 지식의 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은 당신의 방을 떠날 필요가 없다. 당신의 책상에 앉아 귀를 기울여라.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다. 그저 기다려라.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저 고요하고 잠잠하고 고독해지는 법을 배워라. 그러면 세상은 당신에게 거리낌 없이 몸을 맡겨 제 참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세상은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다. 세상은 당신 발치에서 황홀경에 빠져 뒹굴 것이다.'
우주의 풍요, 그 아낌없는 내보임과 풍부함은 자연의 창조적 심성의 표현이다. 당신이 자연의 심성에 맞춰 조율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당신은 자연의 가없고 매임 없는 창조성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우선은 당신 마음 속 대화의 혼란스러움을 뛰어 넘어야만, 풍부하고 넘쳐흐르는, 무한하고 창조적인 심성과 연결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영원하고 매임 없고 창조적인 심성의 고요함을 지닌 채로 기운찬 활동의 가능성의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고요하고 매임 없고 영원한 심성과 역동적이고 유한하며 개인적인 심성이 이렇게 기막히게 합쳐지면 당신이 원하는 그 무엇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정(靜)과 동(動)의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진다. 정과 동이라는 반대 항이 공존하게 되면 당신은 상황, 맥락, 사람, 사물들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이 반대항의 절묘한 공존을 조용한 마음으로 인정할 때 당신은 에너지 세계에 동참하게 된다. 에너지 세계란 물질계의 원천이 되면서 그 자신은 물질이 아니고 재료도 아닌 양자 수프(quantum soup)를 말한다. 이 에너지 세계는 유동적이고 역동적이며 신축성이 있고 변화하며 언제나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또 변함이 없고 잠잠하고 고요하며 영원하고 조용하다.
단지 고요함만으로는 창조성의 잠재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움직임만으로는 창조성이 표현되는 어느 한 측면일 따름이다. 그러나 정과 동이 결합되면 당신의 창조성을 모든 방향으로 자유로이 해방시킬 수가 있다. 당신의 주의력이 어디로 끌리든 말이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활동하면서 어디를 가든, 당신의 잠잠함을 늘 당신 안에 지니고 다녀라. 그러면 당신이 창조성의 저수지, 즉 순수 잠재력의 장에 다가가는 걸음을 당신 주위의 혼돈스런 움직임이 결코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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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수 잠재력의 법칙'을 실천하기 위하여 다음 단계를 밟기로 한다.
1. 나는 매일 조용히 입을 다물고 단지 존재하는 것에 시간을 들임으로써 순수 잠재력의 장과 접촉한다. 나는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약 30분씩 홀로 앉아 고요히 명상한다.
2. 나는 매일 시간을 내어 자연과 사귀고, 살아있는 만물 속에 깃든 지성을 조용히 지켜본다. 나는 조용히 앉아 지는 해를 지켜보거나, 대양이나 시냇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저 꽃내음을 맡을 것이다. 나 자신의 침묵의 황홀경 속에서, 또 자연과의 사귐을 통해서, 나는 여러 시대의 삶의 고동, 순수 잠재력의 장과 한없는 창조성을 즐길 것이다.
3. 나는 비 판단을 실천에 옮긴다. 다음과 같은 다짐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나는 오늘 일어나는 어떤 일도 판단하지 않겠다.' 하루 종일 나는 판단하지 말자는 다짐을 되새길 것이다.
침묵과 명상, 비판단, 자연과의 교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