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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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역사
이스라엘인(헤브라이인)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 땅(팔레스타인, 오늘날 이스라엘의 땅)에 들어온 것은 약 4,000년 전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에 종사하고 야훼(여호와)의 신앙을 확립하였다. 이들의 역사는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집트왕 메르엔프타하가 자신의 전적을 기념하면서 세운 전승비문(戰勝碑文:BC 13세기 후반)에 자신에게 정복된 민족의 하나인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명을 기록하여 두어 역사상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이스라엘민족은 이주민이었기 때문에 주위의 토착 종족에게 압박당하여 일부 부족은 이집트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이집트의 생활에 견딜 수 없어 모세의 인도로 팔레스티나로 탈출하였다. 메르엔프타하가 이스라엘을 격파한 시기가 바로 이 때 쯤으로 추측된다. BC 11세기 사울은 이집트의 지배가 쇠약하여진 틈을 이용, 가나안 땅의 선주민 펠리시테인(필리시티아인)과 싸워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은 예루살렘을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이 곳에 왕궁과 야훼의 성전을 세웠다. 그 뒤부터 다윗 왕가와 야훼의 성전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민족적 자각의 중심이 되었다.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 왕국은 전성시대를 이룩하였으나 솔로몬왕이 죽은 뒤 왕국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한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대(유데아) 왕국으로 나누어졌다. 이스라엘 왕국은 BC 722년에 아시리아왕 사르곤 2세에게 멸망당하였고, 유대 왕국도 BC 586년 신(新)바빌로니아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수도 예루살렘을 점령당하고 멸망하였다. 유대인은 사로잡혀 유명한 바빌론 포로생활에 들어갔다.
BC 538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Cyrus II, 재위 559 -530 BC) 때 유대인들은 해방되어 귀국,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교를 성립시켰으나 BC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대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BC 1세기에는 로마의 속주(屬州)로 편입되었다. 로마 지배 하에서 반독립정권을 형성하고 로마 제국에 저항하였으나 티투스 황제 때 탄압당하여 세계 각지로 흩어져 수세기 동안 표류하며 박해받는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에 들어서 세계 각지의 내셔널리즘이 발흥하는 가운데 동유럽 및 러시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민족 억압이 드세졌다. 이에 유대인들 사이에 시오니즘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의 조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약속받은 성지(聖地)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조국을 세워야만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끝난다고 믿는 시오니즘은 1887년 오스트리아의 테오도르헤르첼이 스위스 바젤에서 시오니스트 대회를 개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운동화되었다. 그러나 지지부진하여 1882년 팔레스타인으로의 최초의 유대인 이민이 시작된 지 35년 뒤인 1917년까지 이주민은 겨우 3만 200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은 당시 중동에서의 영국군 작전기지 역할을 맡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을 아랍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전세계 유대인을 현혹시키는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고, 전후(戰後)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조국 건설 허락을 약속하였다. 전후에도 동(東)유럽 여러 국가에서 유대인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고 1930년대에는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즘이 등장하여 유대인에 대한 대학살이 이루어지자 시오니즘 운동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팔레스타인은 1918년 영국의 군정 하에, 1920년에는 영국의 위임통치 하에 있었으나, 팔레스타인에의 유대인 이민은 격증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7만 정도였던 유대인 인구는 이주민의 유입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약 40만으로 늘어났다.
유대인 이민의 증대는 아랍인과의 대립·항쟁을 가져왔다. 소수파로의 전락과 토지상실을 두려워한 아랍인은 19년부터 종종 반(反)영국·반(反)유대 폭동을 일으켰고, 193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1939년까지는 전국적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두 민족의 대립은 한때 가라앉기도 하였으나 대전 말기에는 다시 격화되어, 이번에는 유대인 쪽이 독립을 억제하려는 영국에 반발하여 반영(反英)·반아랍 투쟁을 하게 되었다. 전후에 대립은 한층 격화되었다.
영국은 두 민족의 대립을 진압하고 전략적 요충지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위임통치 방기(放棄)를 결의, 1947년 문제를 UN에 이관하였다. UN 총회는 1947년 11월 아랍·유대의 연방화안(案)과 아랍·유대의 개별국가 건설과 함께 예루살렘을 국제관리하에 두도록 하는 분할안(案)의 두 안을 상정, 후자가 2/3 이상의 다수로 채택되었다. 팔레스타인을 대소(對蘇) 전략의 일환으로 삼으려는 미국이 시오니즘에 반대하면서도 유대, 아랍 양 민족의 민족자결을 승인하는 구소련과 함께 분할안에 찬성하였다. 분할안은 유대인 쪽은 찬성하였으나 아랍 쪽은 반대하여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아랍의 게릴라전이 격화되었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고 영국군의 철수완료와 함께 유대 국가건국위원회 의장 벤 구리온이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였다. 동시에 아랍연맹에 가입한 아랍 제국의 정규군이 팔레스타인에 침입하여 제1차 중동전쟁(아랍이스라엘분쟁, 팔레스타인전쟁)이 개시되었다. 이스라엘은 개전시(開戰時)에는 열세였으나 마침내 아랍을 압박하여 1949년 정전(停戰)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아랍 대 이스라엘의 대립은 계속되어 1956년 10월 제2차 중동전쟁(아랍이스라엘분쟁, 수에즈 전쟁),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아랍이스라엘분쟁, 6일전쟁),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아랍이스라엘분쟁, 10월전쟁) 등 모두 4차례에 걸친 전쟁을 하였다.
그동안 정치적으로는 1949년 1차 총선 이래 28년간 노동당연합(마파이당, 시온 노동자당, 노동자 리스트의 3당 연합)이 집권해 왔으나 1977년 5월 9차 총선에서 보수우익의 리쿠드당이 집권하였다. 1983년 7월 총선에서는 노동당연합이 승리했으나 과반수 의석을 얻지 못해 리쿠드당과 타협하여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다. 윤번제 집권 합의에 따라 노동당의 S.페레스가 먼저 총리가 되고, 1986년에는 리쿠드당의 I.샤미르가 총리가 되었다. 1990년 3월 대(對) 아랍 정책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양당의 협조가 깨어지자 6월 총리 샤미르는 극우성향의 내각을 구성하고 대아랍 강경책을 펼쳤다. 그러나 강경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1992년 6월 총선에서 라빈이 이끄는 노동당연합이 리쿠드당을 누르고 압승하였다.
이로써 대 아랍 정책이 유화적 방향으로 선회한 가운데 1993년 9월 이스라엘은 아라파트 의장이 이끄는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겠다고 발표했으며, 1994년 5월 4일 미국의 중재로 총리 라빈과 PLO 의장 아라파트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담을 통하여 가자(Gaza) 지구와 요르단 예리코시(市)에 대한 자치협정 체결에 성공하였다. 1999년 7월 노동당의 예후드 바라크 정권이 출범하여 중동평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2000년 7월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 중재한 캠프데이비드 협상이 결렬되고 이스라엘 내의 반발세력이 커지면서 바라크는 사임하였다. 2001년 2월 실시된 총리 선거에서 우파인 리쿠드당의 샤론이 당선되어 전임 바라크의 잔여임기인 2003년 11월까지 총리직을 맡게 되었다. 이후 샤론은 거국내각 구성과정에서 제기된 문제점(우파 소외세력 및 좌파 비판세력)과 팔레스타인 사태 격화에 따른 좌·우파간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샤론이 성전산을 방문한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태가 격화되었고, 2001년 10월에 이스라엘 관광장관이 암살되면서 팔레스타인의 자살 테러 공격과 이스라엘의 보복군사 조치라는 폭력의 악순환이 나타났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완전자치구 침공, 가자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정부건물 공습, 레바논의 남부 헤즈볼라지역 공습으로 이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스라엘의 역사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