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이해


부정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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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성에 대하여
 
부정성이 발생하는 것은 꼭 나쁘기 때문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볼 때 선악의 구도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
사물을 볼 때 옳고 그름의 시야로 바라보는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을 판단할 때 저 사람은 사람이 부정적이다.
라고 말하는 경우에는 어둡고 비판적이고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자신이 밝다고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부정성을 가지고 있다.
분명히 겉모습은 밝아 보이는데 내면으로 들어가면 부정성을 가지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사람이 이목구비를 통해서 사물을 보고 듣기 대문에 그러한 것이다.
사람은 외에서 정보를 받기 때문에
외부의 사물이 부정적이라면 외부를 볼 때 발생하는 부정성은 피해 갈 수 없다.
만약에 외부에서 부정성에 관한 정보가 없다면 외부로 인한 부정성은 들어 오지 않을 것이지만
외부의 환경이 부정성이 강한 환경이라면 외부의 부정성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외부에서 시작되든지 외부에서 시작되든지 부정성을 아예 피해 갈 수는 없다.
설령 사람의 겉모습이 밝아 보여도 내부에 부정성이 존재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부정성의 반증이 무어냐면 질병의 발생이나 사고 같은 것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질병이란 불균형이고 부조화가 나타난 것이다.
즉 질병이란 불편함이다.
편안함의 반대가 곧 불편함이다.
불편함이란 의식이 불균형할 때 일어하는 현상이다.
 
부정성이라 하면 옳바르지 않은 것을 말하는데
어떤 올바르지 않은 것, 나쁜 것이 있어서
싫어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원하지 않는 마음이 일어 날 수 있다.
 
이원성이란 내가 사물을 볼 때 선과 악의 구도로 나누어서 바라보는 시야를 말한다.
사물을 볼 때 선악구도로 바라보는 시야가 이원성이다.
선악구도와 같은 이원성이 의식에 깊게 뿌리 내리면
사물에 대한 부정성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된다.
부정성이란 누군가 잘못된 것, 어긋난 것으로 옳바르지 않은 것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다.
그리고 또 상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생각
또는 신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바로 부정성이다.
사물을 바라보면서 생겨나는 부정성으로 인하여 커다란 고통을 얻을 수도 있다.
 
앞장에서 일러준 적절함에 대한 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적절하다는 것과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면
사물을 볼 때 생겨나는 부정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졸업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 오는 부정성은
부정적인 것 그리고 부정적인 것을 볼 때 일어나는 파동이다.
부정적인 것에서 나오는 파동이나
그러한 부정적인 것을 볼 때 일어나는 파동이나 진동수는 동일하다.
그래서 대학교 총장이라 해도 길거리에서 싸우고 있게 되면 시비를 떠나서 둘다 똑같이 보인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서로 자신이 옳다고 하겠지만 지나가던 사람이 보면 둘다 똑같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뭐냐면 
이 세상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부정성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면에서 좋은 파동이 나오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말은 무슨뜻이냐 하면 우주적 원리적인 면에서 보면
세상이란 내가 좋으면 세상도 좋은 것이다.
반대로 내가 나쁘면 세상도 나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좋은 파동으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에 대한 판단은 뭐냐면 
남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남을 올바르게 해주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므로
남을 바르게 해주려는 노력을 하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남에 대한 마음은 선한 마음이겠지만
남이 잘 못되었다는 생각, 남이 나쁘다는 생각은
나 자신에게 부정성을 불러오므로 그것이 결국은 나에게 고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데서 일어나는 고통이 아니라 모두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외부가 원인이라 하지만 정작 고통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남의 잘못된 것이나 그릇된 모습을 볼 때 일어나는 부정적인 생각이 일어나지만
상대와 나는 진동수가 동일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문제와 남의 문제 그리고 세상의 문제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접하고 관하게 되면 이미 동일한 파동일 일어나는 것이다.
때문에 세상을 개선하려고 노력을 하고 남을 고쳐주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지만
실상 변화 되는 것은 거의 없다.  
왜 그러할까?
그것은 나는 옳고 상대를 틀렸다는 분리의식으로 인함이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상대와 내가 서로 하나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작으로 힘든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된다.
 
그러면 남이 잘못되었을 때 남을 외면하거나 세상을 외면해 버리는 것이 적절하겠는가?
그것은 또 그렇지 않다.
그러면 남에 대한 판단을 버리고 시비를 버리고 남에 대한 지적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인가?
그럴수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다른 사람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하고
세상도 바로 잡으려는 마음 가짐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나의 내면은 어떠한가를 되돌아 보자.
 
중요한 것은 뭐냐면
먼저 외부에 존재하는 타인이나 세상보다 자신을 더 잘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안다고 하는 것은 상대를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나와 상대를 정확히 알면 세상을 볼 때도 깊이 있게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나를 먼저 관하는 것으로 타인을 알게 되고 나아가 세상도 알게 되는 것이다.
세상살이에서 나자신의 삶을 내가 원하는대로 다루고자 한다면
결국은 세상을 달관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면 세상을 볼 때 안과 밖이 없는 심오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이 또 적절한 것일 수 있는 것이지만
나와 남의 관계 나와 세상의 관계에서 가장 적절한 길은 무엇일까? 
.........
 
그것은 곧 사랑이다.
사랑이란 세상을 향해서 등불이 되어 밝게 비쳐주는 마음이다.
나와 남을 넘어서 남을 도와주려는 마음이다.
남을 돌봐주는데서 나자신의 힐링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곧 기쁨이며 행복이다.
힐링이란 나자신이 사랑으로 존재하기다.
 
사랑은 어디서 오는가?
 
사랑은 어데 먼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온다.
가슴 깊은 곳에 무한한 사랑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끌어 내야 한다. 
사랑을 끌어내주면 사랑이 활성화 된다.  
때문에 진정한 힐링이란 나의 가슴에서 사랑을 끌어내는데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진화의 과정에 있다.
세상을 볼 때 진화의 측면에서 보면 만사가 다 적절하다.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실상은 각자 자신에게 맞는 진화의 여정을 걸어 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보자.
물론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부정성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스스로 부정한자와  
그러한 부정한 자를 보면서 부정성이 일어나는 것
서로 다른 듯해도 진동수는 동일하다.
 
부정성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는 것은 위치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부정성은 나와 남에 대한 이해와 깊이에서 해소 될 수 있다.
사물을 관할 때 일어나는 부정성은
이원성의 선악구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또 부정성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에서 일어나게 된다.
빛이 강하면 어둠이 강해지는 바와 같이 위에서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성직자의 의식에 이원성의 선악구도가 있으면 거기에서 부정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자신이 성직자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교직자의 의식에 옳고 그름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서 부정성이 더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교직자는 가르치는 사람이다.
사람들에 대하여 본질을 보고 영적자아를 발현시켜주는 교육을 해야지 옳고 그름의 시비로서
사람들을 이끌어 가려하면 교육의 역효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지도자의 의식에 우월감이 있으면 그로 인해서 오히려 부정성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지도자는 위아래를 아울러 본보기가 되어야지 사람들위에서서 지배하는 것은 과거의 낡은 방식이다.
그러므로 성직자와 교직자와 지도자는 항상 사물의 본질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얼마전 어떤 이에게 고마움의 표시로서 12각 스티커를 무상으로 제공하였다.
암에 걸린 분의 침대 아래 12각 스티커를 배치해 두었는데
그 다음날 어찌 알았는지 매트리스를 들어내고 모두 버렸다고 한다.
왜 그럴까?
어떤 면에서 부정성도 진화의 과정에서 적절한 것이다.
지금 그는 부정성에 대한 학습을 하는 것이다.  
드라마를 할 때는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는데
드라마에서 내가 어둠의 역할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또 부정성에 대한 학습을 선택한 것이다.
때문에 의식상승는 구지 원치않는 사람에게 12각은 주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12각은 무엇일까?
12각은 빛이다.
12각은 5차원의 조건없는 사랑이다.
12각은 물리적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향성과 같은 대립이 없다.
12각의 세상에는 부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정성의 학습이 주 목적인 사람의 경우에
12각이 들어가면 12각이 어둠을 상쇠하므로
자신이 선택한 부정성에 대한 학습을 완료할 수 없게 된다.
12각로 인해서 자신이 깨닫고자하는 학습을 완수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응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원치 안는데 12각은 주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나중에 깨달아서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원치않을 때는 차라리 가만있는 것이 더 적절하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학습을 하고 있다.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 대해서 깊이 있는 학습을 통하면 그것이 곧 진화상승이다.
진화상승이란 것은 밝은 것 선한것 올바른 것 이로운 것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것 악한 것 해로운 것 어두운 것에 대한 깨달음도 진화상승의 한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다 적절하다.
 
농사를 보면
씨앗을 뿌려 싹이 나고 가지가 나오고 점점 더 자라나서 성장을 하게 된다.
때가 되면 꽃이 핀다. 
그리고 꽃이지고 나면 거기에서 열매가 열린다.
한알의 씨앗이 땅에 심어지면 거기에서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에 심을 좋은 종자를 갈무리 해두게 된다.
이것이 농사를 짓는 이치다.
좋은 씨앗을 뿌려서 많은 알곡을 거두고자 함이고
더 좋은 씨종자를 얻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법리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은 농사짓는 이치와 같다.
사람이 세상을 산다고 할 때 사람마다 각자 자신의 역할이 있다. 
곡식을 심으면 머잖아 씨앗과 뿌리/ 줄기와 가지 / 잎사귀와 꽃 / 최종적으로 열매와 씨종자를 얻는 바와 같이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각자 자신이 선택한 역할을 한다.
우주는 오직 원리로 돌아간다.
인간이 세상을 사는 것도 이러한 원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보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물이 있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얻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진화를 통해서 지금보다 더 많은 알곡을 얻고자 함이며
나아가 더 좋은 알곡과 씨종자를 생산하려고 한다.
이것이 자연사물이 진화하는 목적이다.
 
사람의 진화하는 과정이 자연의 원리와 동일하다.
우리가 지금 의식상승을 하는 것은
나의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높이는데 있는 것이다.
의식상승은 인간완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다.
의식상승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다같이 해나가야 할 길이다.
 
인류는 어둠이 나쁘다고 할 것이지만 이 세상에 어둠이 있는 것은
그러한 어둠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높이기 위함인 것이다.
사람이 어둠을 체험하는 것은 어둠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빛과 어둠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인류가 진화하고 상승하는 이유다.
인간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것은 진화하여 상승하고자 함이다.
 
사물을 볼 때 힘들여서
누구는 좋고 누구는 나쁘고 이런데 몰입하는 시간보다는
진정으로 나 자신을 의식상승하는 것이 백배 더 중요하다.
의식의 초점을 사랑에 맞추고 가슴의 사랑을 크게 활성화 해야 한다.
 
보면 성직자들이 심판관이 되어 세상을 두루 헐뜯는데
자신은 옳고 남은 그르다는 식의 가르침을 준다면 그것이 바로 성직자의 부정성이다.
여러가지 질병이 발생하고 사고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성직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
우주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원리대로 돌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많이 알아도 이러한 리를 모르면 어두워지는 법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종교학을 외운다 할지라도
자신이 본래 누구인지 사람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면
질병이 발생하고 사고가 나오게 된다.
 
어떤이는 종교를 수십년하다 당뇨나 암에 걸렸는데
예전에는 몰랐어요.
몸을 막굴려서 병이 왔어요 이러거든
그런데 그게 왜 그러냐면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질병이나 사고는 원리에서 벗어나면 오는 것이고 원리가 맞으면 질병의 소굴에 들어가 있어도
질병이 업드리는 법이다.
개장사가 뜨면 모든 개가 업드리고
땅꾼이 뜨면 모든 뱀이 업드리는 바와 같이
원리인이 나타나면 만가지 질병이 더 이상 작동을 멈춘다.
 
병든 사람 방 천정에 12각은 100장~1000장 정도 방에다 집중해서 부착해두면
갑자기 통증이 사라지니 진통제를 안먹어도 통증이 사라지게 되고
병이 멈추는 것을 체험하는 일은 누구나 다 되는 것인데 
이는 신비주의가 아니 원리가 맞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신비주의도 아니고 원리주의라는 점이다. 
그래서 12각은 원리라는 점을 인식하면 되는 것이다.
 
자 이제는 굴레를 벗어 버리고 사물의 본질을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원성에 대한 학습과정이겠지만 이원성의 학습을 넘어서
정작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슴속에 물어 볼 필요성이 있겠다.
왜냐하면 가슴에는 나의 본질이 있으니까
가슴에서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물의 변화 원리라는 것은
내가 늘 무엇을 보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나 자신이 주시하는 것은 그것이 부각하고 부각한 것은 활성화 되는 법이다.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주시하면 주시할 수록 그것이 부각되고 부각된 것은 활성화 되니
세상에 대하여 타인에 대하여 남이 틀리고 그르다는 생각으로 타인을 대하지 않는 것이
심신을 편안케 하는 일이다.
나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데
정확한 판단은 정말 힘이 든다.
 
그러나 그것도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면 겪을 것을 다 겪고 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가지고온 운명대로 사는 법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소망하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진성으로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지금 어떻게 존재하는가?  
 
 
빛과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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