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염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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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염이란 인산선생께서 창조한 말
"죽염이란 말은 내가 창조한 말인데 문헌에 나올리가 있겠느냐?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소금을 불에 구워 양치소금으로 쓰고, 눈병에는 눈에 넣고,중이염에는 귀에 넣고, 혓바닥에 백태가 끼면 그것으로 바르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소금을 대나무에 다져 넣은 후 진흙을 바르기도 하고 또는 바르지 않은 채 그냥 불에 구워 썼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흙을 바르는 것이 좋다고 하시면서 반드시 심산에서 진흙을 캐다가 대나무의 아구리를 바른 다음 겻불에 묻어두고 불로 태웠다. 3일 후 겻불이 다 사위면 소금덩어리가 나오는데 그것을 꺼내어 약용으로 썼다```그런데 할아버지의 방법과 같이 겻불에 한 번 구워 쓰는 것은 내가 볼 때는 큰 신비가 나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때문에 나는 죽염을 만들 때 예전의 방법과는 달리 송진 등으로 불의 온도도 고도로 높이고 불에 구워내는 회수도(한방에서 전통적으로 약재를 9번 법제하듯) 9번으로 늘리어 약용으로 쓴 것이다. 물론 한 번 구워낸 것도 약용으로 쓸 수는 있으나, 9번 구워내야만
그 속에서 진정한 신비가 이루어진다!"
죽염의 유래
죽염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래 논고의 이끄는 말과 본 사진본 논고의 '죽염의 기원'항을 읽고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시간과 기회가 있을 때 좀더 상세히 논급해 보기로 하겠다.
죽염의 본초학적 고찰
이끄는 말- 아래 사진본으로 올린 논고는 본인이 1987년 8월에 계간지 성격으로 창간된 《민속신약》의 뒤를 이어 1989년 7월에 창간된 월간지 《민의약》 창간호에 게재한 글이다. 20년전 본인이 쓴 글을 지금의 시기에 새삼 사진본으로라도 다시 올려 놓는 까닭은 본회 회원님들 및 이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많은 이들이 오늘날 심하게 왜곡되어가고 있는 죽염의 역사를 정확히 인지해 주시기를 바람에서이다!
아래 논고 중 '죽염의 기원' 항을 읽어보면 죽염의 유래에 관한 진실을 잘 알게 될 것이다. 근래에 죽염의 원조에 관하여 꽤 논난이 있기도 한데, 죽염의 원조는 어디까지나 '인산죽염'이고 이의 발명자는 생존해 계시면 금년에 만 100세가되시는 인산(仁山) 김일훈(金一勳:1909~1992) 선생이시다.
본인은 1960년대 후반 중학교 시절부터 집(성혜한의원)에 상비약으로 갗추고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나 환자들이 위장병이 있거나 배탈 등이 있는 이면 늘 무료로 나누어 주시기도 하였던 죽염을 처음으로 접한 이후 이를 수시로 먹으며 성장하였다. 물론 그 이전부터도 인산 선생은 죽염을 상비약으로 만들어두고 많은 속병 환자들에게 이를 무료로 주시며 복용케 하셨으나 이 무렵 선생이 서울 충무로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계셨을 때의 원 살림집은 대전에 있었고 본인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선생이 계신 한의원 집으로 합류하였기 때문에 이 때서야 비로소 죽염이란 것을 접하고 먹어보게 된 것이다. 이 때 선생께서는 배탈 따위로 아프기만 하면 소금약(죽염)을 먹으라고 하셨다. 이처럼 본인은 1960년대 후엽부터 죽염을 수시로 먹으면서 성장한 사람이고 또한 인산 선생이 '죽염'을 최초로 문자화하여 1980~1981년에 세상에 공개한 《우주와 신약》 및 《구세신방》을 친히 집필하신 저술 원고를 본인이 분류, 정리하여 편집한 사람으로 누구보다도 죽염의 역사를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최근에 이르러 죽염의 원조에 있어서 주객이 전도되고 죽염의 역사가 왜곡되는 것이 정도를 넘어 꽤 심화되고 있는 것을 계속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올려 놓게 되었다.
본인은 1980년 《우주와 신약》 출간 이후 이 책이 한문본에 가까운 문장으로 기술되어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선생께 건의하여 수정 증보판을 내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려 인가를 받은 후 선생께 증보원고를 부탁드리고 나도 기존의 한문 문장들을 좀더 쉽게 한글화하였으며, 분류체계도 동의보감의 목록체계를 참조하여 좀더 체계를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책 내용과 원고를 가지고 너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꾸지람도 듣기도 하였다. 선생께서는 본래 이북분이시라 성격이 상당히 급하신 편이었다. 그 때 본인더러 하시는 말씀이 '이제는 죽염을 세상에 알릴 때가 되었다. 시간이 없으니 그렇게 세월을 보내면서 그만 쭈물덕거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엔 선생의 말씀이 꽤 섭섭하게도 들리고 왜 그렇게 서두르시는지 이유를 몰랐으나, 이후 3년이 지난 시기부터 전국을 순회하며 건강강연을 하시게 되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곧 미래에 닥쳐올 공해독, 농약독 등 환경오염 시대에 죽염이 주장약으로써 상비약으로 갖추어 활용할 시기가 멀지 않았다고 여기시고 빨리 세상에 전해주시고자 하신 구세제중(救世濟衆)의 깊은 뜻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천일염을 구운소금으로 만들어 질병치료에 이용한 것은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 이를 한의약적 용어로 초염(炒鹽)`오염(熬鹽)`연염(鍊鹽)`구염(灸鹽) 등으로 일컬어온 것을 살필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연염(鍊鹽)은 당(唐)나라 유우석(劉禹錫)의 전신방(傳信方)의 연염흑환방(鍊鹽黑丸方)에 보이는 구운소금 제조법으로 소금을 넣는 용기만 도자기류의 자기병을 이용하는 것이 다를 뿐 죽염을 굽는 원리와 상당히 흡사한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천일염을 구운 소금으로 만들 때 대통을 이용한 용례 및 '죽염(竹鹽)'이란 용어의 용례는 한국과 중국의 각종 한의서류 및 중국의 사고전서 우리나라의 한국문집총간의 각종 문집들 및 조선왕조실록 등 어떠한 서책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천일염을 대통 속에 넣어 구워낸 죽염을 만들어 질병치료 등에 이용한 것은 인산 선생의 생전의 말씀에 의하면, 유의였던 선생의 조부(김면섭:1852~1926) 때부터였다. 이 때 만든 죽염은 비록 대나무통 속에 천일염을 넣어 구워 만든 죽염이긴 하였으나 굽는 회수가 1~3회 정도 구운 죽염이었을 뿐 이를 구전금단처럼 9회 죽염으로 만드신 이는 인산 선생이시다. 선생과 생전에 많은 대화를 나누어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잘 알겠지만, 선생은 유가`불가`도가의 각종 경서에 두루 해박하신 분이고 또 《구세신방》과 《신약》 및 《신약본초》 등의 저서를 보면 알겠지만 산천의 갖가지 초목과 동물들이 천상의 어느 별정기를 감응한 것이라는 성정론(星精論) 등을 거침없이 논하고 있는 일례를 보면 세상 어느 누구도 그러한 의철학적 논리전개를 쉽게 언급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으로서 본래가 생이지지(生而知之)하신 분이다. 때문에 평생을 누구한테 배운 적이 거의 없는 분이시나 집안의 맏형(김봉진)이 1930년대에 전기시설물인 두꺼비집을 발명하신 이로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신 이라 집안에 있었던 맏형의 서책을 탐독하여 자득한 후 그 영향으로 기계 따위에도 괭장히 밝으셨다. 일제시대에는 독립군 신분으로 세상 속에 숨어지내던 중에 장진강수력발전소의 데깡노바시 공사감독도 하신 적이 있었던 분이다. 그러한 분이었기에 오는날과 같은 철학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죽염제조법을 발명하여 만천하에 공개하신 것이다.
선생께서 75세 때 필자인 본인에게 붓글씨로 써주신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도는 천지간의 아무 형태도 없는 무형세계 경계까지 통하고,(道通天地無形外)
생각은 풍운이 조화로이 변화하는 모습 가운데 잠기네!(思入風雲變態中)
본인은 늘 거실 입구에 걸어놓은 위의 시를 보면서 선생이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나 우리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들을 다 표현할 수 있는 문자가 부족하여 알고 있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다 설명해 줄 수 없는 것이 늘 안타깝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곤 한다. 그만큼 선생의 의철학사상은 고금의 어느 의서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이론들이 많이 보인다!
본인은 어려서부터 선생이 비록 불가의 송만공 스님, 오대산의 방한암 스님, 북한산 도선사의 이청담 스님 등과의 교유했던 내용과 일화 등을 손님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을 많이 들은 바 있으나, 선생이 사찰에 전해지는 죽염제조법을 들었거나 배웠다는 이야기는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통일신라 때의 진표율사가 죽염제조법을 개암사 주지들에게 전승해 주었다는 세간의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이는 인산죽염이 상품으로 세상에 나온 후 뒤를 이어 2호 죽염으로서 세상에 나온 개암죽염이 개암사에서 효산이라는 불승과 함께 죽염을 만들게 되면서 상업상의 전략적 차원에서 퍼뜨린 이야기이다. 삼국유사, 송고승전 및 금석문 등에 전하는 진표율사사적에 의하면 그가 죽염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또한 진표율사는 김제 모악산 금산사에서 출가하였고 득도 후 뒤에 금산사에 주석하면서 금산사를 크게 중창하며 미륵장륙존상을 조성하기도 하였으므로 만약에 진표율사가 죽염제조법을 절의 주지에게 전승해 주었다면 그의 고향집과 같은 금산사 주지에게 전해주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보잘 것 없는 사찰로 진표율사가 머문 적도 없는 개암사 주지에게 비법인 죽염제조법을 전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표율사가 가장 많이 머무른 확실한 고찰은 금산사외에 동해안의 금강산 발연사가 있고 한때 머물던 절로는 그가 수도 정진한 변산의 부사의방 및 영산사와 속리산 법주사의 전신인 길상사 등이다. 이 중에서도 진표율사가 불사를 행하고서 가장 오래 주석하신 절은 금산사와 발연사이다.
개암죽염을 만든 이모 경영위원장은 불교서적을 출간하는 밀알출판사의 사장으로 1980년대에 불교신문사 기자로도 있었던 현 (주)인산가의 김윤세 회장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다. 그 인연으로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된 인산 선생의 저서 신약 이라는 책을 밀알출판사의 계열출판사인 나무에서 발행하게 되면서 개암의 이모 위원장도 새삼 죽염의 가치에 놀라게 되면서 죽염사업에도 뛰어들게 된 것이다.
《신약》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 인산 선생 저서인 《우주와 신약》 `《구세신방》보다 훨씬더 평이한 문체로 읽기 쉽게 기술되어 일반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 내용과 표지 디자인 등 책의 전반적인 문제도 충분히 시간을 갖고 검토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있어서는 본인이 우주와 신약및 구세신방을 편집, 정리한 경험축적과 문학적 소양과 필력이 있는 인산가의 김윤세 회장이 인산 선생이 저술하신 <인명과 체험의학>`<수행인의 건강학> 등을 불교신문 등에 편집, 정리하여 발표한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신약편이란 편목으로 수록하였고, 또 선생께서도 본인이 선생께 문의하면서 새로 정리한 신방편 원고 등을 친히 수정, 보완하시며 교열하여 주셨으며, 또 한학에 조예가 깊은 김윤수 교수(현 대전대 철학과 겸임교수)도 책의 전반적인 교열작업에 참여한 바 있어 총체적으로 좋은 책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구비되어 있었다! 80년대 후반 죽염이 혜성처럼 나타나 세상에 크게 주목받게 된 것은 당시 인산 선생의 순회 건강강연과 더불어 이 신약 책의 힘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인산가의 김회장은 이모위원장 및 그의 형님이신 이향봉 스님과도 돈독한 친분이있는 사이이므로 죽염유래와 관련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시시비비를 굳이 논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장충동에 가면 원조 족발집이 여러 곳 되어 누가 원조인지 모를 지경이고 포천 이동에 가면 원조 이동갈비집들 또한 수북히 자리하고 있어 아는 사람 아니면 진짜 원조집을 금방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장사속 생리임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인도 굳이 죽염의 원조를 별로 따져오지 않았으나, 최근에 보니 죽염의 유래가 단지 사업상의 영업전략적 기록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상의 사전류 등 공적인 기록에까지도 정착하고 있고 심지어 중국 인터넷상에는 공공연하게 죽염이 진표율사가 전해준 것으로 언급되고도 있어 이제는 더이상 방치만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업상의 장사꾼들 세계와는 거리가 먼 본인이 진실이 심하게 왜곡되어가고 있는 죽염의 역사를 바로 잡고자 한 마디 하게된 것이다! 거짓의 역사기록도 수십년, 수백년의 세월이 흘러가면 후세 사람들은 그 진위를 가리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영남과 호남에서 각기 주장하는 임진왜란 시기의 진주 삼장사설과 삼장사시의 작가이다.
신라 시기의 진표율사가 세상에 죽염제조법을 전해주었다면 그는 당대에 미륵불과 같이 존숭을 받았던 신승이므로 중생구제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제조법을 전해 주었을 것이고 그에 관한 기록도 반드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인산 선생은 그가 저서인 《구세신방》에 휘호로 남긴 '일생지망 구세(一生之望救世)'라는 글귀 및 즐겨 써주신 휘호 '박시제중(博施濟衆)' 이란 글귀를 보면 선생의 인술의 정신, 구세정신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이 죽염에 대한 물질특허를 내지 않고 《우주와 신약》, 《신약》 등의 저서에 그 제조법을 누구나 만들어 먹을 수있게 상세히 세상에 공개하신 참 뜻은 어느 한 사람이 이를 독점하지말고 공해독, 화공약독 피해가 심화되어 가는 미래의 환경오염시대에 대비한 상비약으로써 세상 사람 누구나 이용하라는 구세정신, 불가어로 말하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자비심으로 세상에 전해주신 최고의 보물인 것이다!
근래에 전라북도에서는 죽염을 제조하는 모승려를 무형문화재로까지 지정한 일예도 보이는데 우스운 일이다. 무형의 문화재라하면 그 인물이 아니면 그 제조비법의 명맥이 끊어져 세상에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되어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지 모승려가 개암죽염에서 자리를 옮겨 소속된 s죽염회사 말고도 전국에는 그러한 제조법을 더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수도 없이 공장장 등으로 일하고 있는데 그러한 제조기술자가 무슨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그러한 기술을 사리사욕과 명예욕에 눈이 어두어 이타심을 지녀야할 불제자의 본분에서 벗어나 장사속 사업자들과 손잡고 그 제조기술을 자신의 전유물로 삼고자하는 이기심을 세상에 보여준 부끄러운 일예가 아닐까 한다!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 양심(良心)에 따라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아니하고 자신의 본래면목을 지켜나가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대인(大人)일 것이다!
죽염의 문헌적 근거에 대하여 항시 궁금해 하던 필자는 얼마 전 이에 대하여 선생께 한 번 여쭈어 보았더니,
곧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죽염이란 말은 내가 창조한 말인데 문헌에 나올리가 있겠느냐?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소금을 불에 구워 양치소금으로 쓰고, 눈병에는 눈에 넣고,중이염에는 귀에 넣고, 혓바닥에 백태가 끼면 그것으로 바르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소금을 대나무에 다져 넣은 후 진흙을 바르기도 하고 또는 바르지 않은 채 그냥 불에 구워 썼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흙을 바르는 것이 좋다고 하시면서 반드시 심산에서 진흙을 캐다가 대나무의 아구리를 바른 다음 겻불에 묻어두고 불로 태웠다. 3일 후 겻불이 다 사위면 소금덩어리가 나오는데 그것을 꺼내어 약용으로 썼다```그런데 할아버지의 방법과 같이 겻불에 한 번 구워 쓰는 것은 내가 볼 때는 큰 신비가 나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때문에 나는 죽염을 만들 때 예전의 방법과는 달리 송진 등으로 불의 온도도 고도로 높이고 불에 구워내는 회수도(한방에서 전통적으로 약재를 9번 법제하듯) 9번으로 늘리어 약용으로 쓴 것이다. 물론 한 번 구워낸 것도 약용으로 쓸 수는 있으나, 9번 구워내야만
그 속에서 진정한 신비가 이루어진다!"
선생은 또 다음과 같이 소금에 대하여 논급한 일이 있다.
"물 가운데서 응고(凝固)하는 수정(水精)이 곧 소금이다. 소금의 간수(簡水) 속에 만 가지 광석물의 성분을 가진 결정체를 보금석(保金石)이라 하고, 보금석 가눈데 비상(砒霜)을 이룰 수 있는 성분을 핵비소(核砒素)라고 하는데 이것이 곧 수정(水精)의 핵(核)이다. 핵비소는 살인물(殺人物)이며 적당량을 섭취하면 활인물(活人物0)로서 만병의 신약(神藥)이 된다."
[출처] 죽염의 유래와 본초학적 고찰|작성자 경산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