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털복숭이 애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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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털복숭이 애벌레
(번역: 유영일)
숲은 늘 생명력이 충만한 곳입니다. 땅을 뒤덮고 있는 낙엽 더미 아래에서는 ‘위대한’ 털복숭이 애벌레가 자신의 추종자들을 향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털복숭이 애벌레가 맡은 일이란 자기 그룹을 잘 지켜줌으로써, 과거의 방식이 언제나처럼 지켜지고 존중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전통이란 신성불가침의 것이었지요.
“말씀인즉슨……”언제나처럼 나뭇잎을 맛있게 갉아먹으며, 위대한 털북숭이 애벌레가 입을 엽니다.
“숲의 정령이 우리 애벌레들에게 모종의 굉장한 소식을 전하고 다닌다고 한다. 어딜 가나 그 소리를 떠들고 다닌다는 것이다.”우적우적.
“나는 이 정령을 만나기로 결단을 내렸다. 우리 나름대로의 대책을 세워 그대들에게 충고하고자 함이다.”“어디에서 그 정령을 만나실 건데요?”추종자 중의 한 명이 물었습니다.
“그 정령이 나에게 올 것이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이곳을 멀리 벗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 이 숲 너머에는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을 테니까. 먹을 게 없으면 살 수도 없고.”우적우적.
추종자들을 해산시키고 혼자가 되자, 위대한 애벌레는 숲의 정령을 소리쳐 불렀습니다. 오래지 않아 거대한 정령이 소리 없이 다가왔습니다. 숲의 정령은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아늑한 나뭇잎 침대를 떠나 본 적이 없는 애벌레로서는 숲의 정령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데요.”위대한 애벌레가 말했습니다.
“조금만 더 위쪽으로 나와 봐요. 난 당신을 만나러 여기 온 거니까.”숲의 정령이 친절한 목소리로 대꾸했습니다. 그러나 애벌레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곳은 자기 집이었고, 숲은 정령은 초대를 받고 잠시 온 것일 뿐이니까요.
“고맙지만 그렇게는 안 하겠어요. 지금 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이란 말예요. 나에게 말해 줘요. 내가 들은 바로는, 우리 애벌레들에게는 거대한 모종의 기적이 일어날 거라던데, 그게 도대체 뭐죠? 우리 애벌레들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개미에게도 아니고 지네에게도 아닌, 우리 애벌레들에게만 말이에요.”그러자 숲의 정령이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그건 정말이에요. 당신들은 경이로운 선물을 이미 받은 셈이에요. 그 선물을 원한다고 결정하기만 하면, 내가 방법을 일러 드리지요.”“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죠? 선물을 이미 받았다니요! 난 무얼 받았다고 사인해 준 기억이 없어요.”대화가 시작된 이래 벌써 세 번째인 잎사귀를 쉴새없이 갉아먹으며, 위대한 털북숭이가 의아해했습니다.
“당신들은 신성한 숲을 지키느라 애써 왔고, 그런 훌륭한 삶을 살아왔기에 거기에 대한 대가를 받은 거예요.”“그게 정말로 틀림없는 사실이에요?”애벌레가 큰 소리로 외치며 말을 이었습니다.
“나는 날이면 날마다 그 일을 하고 있어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난 그룹의 리더랍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 지금 나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지만요. 다른 여느 애벌레가 아닌 나하고 말입니다.”숲의 정령은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직도 잎사귀를 떠나지 않고 있는 애벌레로서는 그 미소를 볼 수 없었지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숲을 신성하게 유지하기 위해 애써 왔어요. 그런 내가 무엇을 얻게 된다고요?”“경이로운 선물이랍니다, 애벌레 씨. 당신은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생물로 변화될 수 있어요. 훨훨 날아다닐 수 있지요. 당신의 빛깔은 정말 눈이 부실 거예요.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은 모두 당신의 우아한 몸 동작에 감탄할 거예요. 원하기만 하면 숲의 어디든지 갈 수 있어요. 숲 위를 훨훨 날아 다니는 거예요. 어디에나 먹을 것이 지천으로 깔려 있고,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다른 생물들도 만날 수 있어요.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을 지금이라도 당장 할 수 있어요.”“날아 다니는 애벌레라!”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애벌레가 말을 이었습니다.
“믿을 수 없군요! 그 말이 진실이라면, 나에게 한 번 보여주시지요. 날아 다니는 애벌레를 말이에요. 그런 애벌레가 있다면 보고 싶군요.”그러자 정령이 대답했습니다.
“그건 아주 쉬워요.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사방을 한 번 둘러보기만 하면 됩니다. 어디에나 다 있어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아다니며, 밝은 태양 아래에서 경이롭고도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요.”“태양이라!”애벌레는 비명처럼 외치면서 말을 이었어요.
“당신이 정녕 숲의 정령이시라면, 태양이 우리 애벌레들에게는 얼마나 뜨거운 것인지 잘 아시겠지요. 태양은 우리를 구워 버려요. 진짜로요. 아시다시피, 우리들의 터럭에는 좋지 않은 것이죠. 그러니 우린 컴컴한 데서 살아야 해요. 터럭이 다 타 버린다면, 우리 털북숭이 애벌레들에게는 그보다 더 재수 나쁜 일은 없을 거예요.”“날개를 지닌 생물로 변화된다면, 태양은 오히려 아름다움을 더해줄 거예요.”정령은 친절하려고 애쓰며, 말을 이었어요.
“당신네들의 낡은 존재 방식은 극적으로 바뀌게 될 겁니다. 그러면 예전의 밑바닥 생활을 청산할 수 있어요. 날개 달린 생물이 되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공중을 날아오르게 되는 겁니다.”애벌레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습니다.
“당신은 결국 이곳 안락한 침대를 떠나기를 바라시는군요. 증거를 얻기 위해서는,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곳으로 나가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거죠?”“증거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참을성 많은 정령이 대답했습니다.
“싫어요,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아시다시피, 난 먹어야 하니까요. 여기에서도 할 일이 잔뜩 있는데, 따가운 햇살 속으로 나가 높은 고지대로 간다는 건 얼간이들이나 할 짓이죠.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당신이 정녕 숲의 정령이시라면, 아실 텐데요. 우리 애벌레들의 눈의 초점은 아래로 향해 있지, 위로 향해 있진 않다는 것을요. 위대하신 지구 여신은 우리가 음식을 찾아낼 수 있도록 눈의 초점을 아래로 향하도록 해 주셨어요. 애벌레라면 삼척동자도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어요. 당신은 지금, 정말 애벌레답지 못한 짓을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점점 더 의심이 많아진 털북숭이 애벌레가 덧붙였습니다.
“위를 올려다본다는 건, 우리가 잘 하지 못하는 일이기도 해요.”애벌레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이윽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날아 다니는 생물이 될 수 있는 거죠?”숲의 정령은 ‘변태’라 불리는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애벌레들이란 원래 변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운명을 타고났다고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타고난 재주를 이용하여 고치 속에서 어떻게 날개 달린 생물로 변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 변신을 하기 위해서는 한 번의 희생을 치러야 하고, 고치 속에서 그윽한 어둠의 시간을 보내며 졸업식에 대비해야 한다고. 아름답고도 색색의 날개 달린 생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노라고.
애벌레는 잠자코 듣고 있었습니다. 우적우적 갉아먹는 소리를 내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외쳤습니다.
“제발 좀 곧이곧대로 말해 줘요. 듣도 보도 못한 생물학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를 염원하며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란 말인가요? 우리 애벌레들 모두가 말이에요. 그러면 뭔가 새로운 물질이 나와서 우리 몸 전체를 가두게 되고, 그렇게 어둠 속에서 몇 달을 지내야 한다고요?”“그래요. 맞았어요.”숲의 정령이 대답했습니다. 이어질 대화 내용이 어떤 것일지는 너무도 뻔했습니다. 정령은 이미 알고 있었지요.
“그러면 위대하신 숲의 정령으로서 한 번 대답해 봐요.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겁니까? 우리 스스로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내 생각에, 우린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는데요!”그러자 정령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새로운 숲의 에너지 속에서 당신 스스로 변화될 수 있는 힘 또한 갖고 있어요. 당신의 나뭇잎 위에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육체는 그 모든 것을 행할 준비를 다 갖추고 있는 셈이에요.”“하늘에서 내려주는 식량이 다 떨어지고, 물도 없고, 사방이 다 벽으로 가로막힌 상태에서 어떻게 여러 날을 지내죠? 그 기간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죠? 내가 어리석은 놈은 아니란 걸 당신도 아시겠죠. 난 몸집이 큰 털북숭이이지만, 겨우 이 근처를 어슬렁댔을 뿐이죠. 지구 여신은 항상 큰 일을 하시지만, 우리가 당신에게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겨우 이런 것일 뿐이에요. 당신이 요구한 대로 따른다면, 우린 모두 굶어죽게 된다는 것! 애벌레라면 삼척동자라도 다 알 거예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언제 어느 때고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요. 당신의 그 새로운 혁명이란 것은, 내가 보기엔 매우 의심스럽군요.”애벌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마침내 숲의 정령을 향해 외쳤습니다.
“꺼져요!”그리고는 몸을 돌려 새로운 먹이감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이었어요. 숲의 정령은 애벌레가 요청한 대로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멀리서 애벌레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날아다니는 애벌레라구? 내 발은 어떡해?!”우적우적.
이튿날, 애벌레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추종자들을 소집했습니다. 모두가 숨죽인 채로 위대한 털북숭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요.
“숲의 정령은 악마다!”애벌레는 추종자들을 향해 선언했습니다.
“그자는 우리를 속여넘겨 어두컴컴한 곳에다가 가두려고 한다. 거기 갇히게 되면 우린 죽고 말 것이다. 우리 자신의 몸뚱이에는 우리들을 날아다니는 애벌레로 변신시킬 능력이 있다고 하면서, 그걸 우리 모두가 믿길 바라는 눈치이지만, 생각해 보라, 몇 달 동안이나 먹지 않고 지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한동안 시끌벅적한 웃음 소리가 계속되었습니다.
“상식과 역사에 대한 지식은, 위대한 지구 여신이 항상 어떠한 방식으로 일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대들을 어두운 곳으로 이끌어 간다면, 그자는 결코 선한 영혼일 리 없다! 혼자서 신이 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라고 요청한다면, 그자는 결코 선한 영혼일 리 없다! 이 모두는 사악한 숲의 정령의 속임수임이 분명하다.”애벌레는 기고만장해져서 목청을 높였습니다.
“나는 악마를 만났지만, 그 정체를 알아내고야 만 것이다!”다른 애벌레들은 모두 그 말에 동의한다는 표시로 몸을 마구 흔들어댔습니다. 몸짓이 더 작은 털북숭이 애벌레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서는, 자신들을 죽음에서 구해 낸 위대한 애벌레를 무등 태우며 찬사의 고함을 소리소리 질러 댔습니다.
애벌레들의 축제를 뒤로 한 채, 위로 위로 올라가 봅시다. 아래쪽의 떠들썩한 소리가 차츰 귓가에서 멀어짐에 따라, 땅바닥을 덮는 낙엽 더미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고, 따사로운 햇살이 맞아 줍니다. 썩은 낙엽 더미를 뚫고 위로 위로 오르며, 비상을 위해 준비된 장소로 나아갑니다. 애벌레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면, 날개를 가진 존재들의 장엄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소위 ‘나비’라 불리는 ‘날아 다니는 애벌레들’이 색색의 날개를 뽐내며, 밝은 햇살 속에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아름다운 비행을 합니다. 나비들은 저마다 찬란한 무지갯빛으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한때, 몸집이 큰 털북숭이의 친구였던 나비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습니다.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숲의 정령이 준 위대한 선물 덕분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런 변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