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이해


세상에 대한 이해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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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한 이해의 과정 
 
어떤 이가 의식상승에게 말하기를
세상에 신이 있다면
어찌하여 이 세상에 독재자들이 있느냐고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런 질문을 할법하다.
 
신이 그의 언어를 어찌 듣지 않았겠는가?
신은 그의 언어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는데
그는 신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신에 대한 부정성의 언어는 아직 낮은 단계에 의식이 머물 때
주로 묻는 물음이지만
그러한 물음의 당사자로서는 늘 세상사가 불공평하고 못마땅하기만 하다.
신을 알지 못하는 이는 애써 힘겨운 길을 가고 있다.
 
그의 삶에는 억울하고 원통한 과거가 배어 있다.
그에게는 세상이 매우 불공평하다.
 
하지만 의식상승가 어찌 그의 입장으로 모르겠는가?
 
세상을 보자.
세상에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많은지.......
이는 누구의 삶인가?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겪는 이들의 삶이다.
그러한 삶은 다 어디서 오는가?
스스로의 주파수에서 온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삶이다.
스스로의 삶이 그러하므로 세상의 모든 삶이 그러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보편적 관념이다.
 
진화의 낮은 단계에서는 항상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세상에 마음이 닫혀 있는 것이다.
높은 진화의 단계에서는 더 이상 억울함이나 원통함이 없다.
 
어찌 하여 이 세상에는 북한과 같이 악의 집단이 있고
이란이나 이라크와 같은 테러 국가들이 있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
 
스스로 지상의 수호자라 부르는 미국은
북한과 이란 이라크 아프카니스탄과 같은 나라를 악의 축이라 부른다.
미국의 중심부에 섯던 부시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러면 진실로 그들이 악의 축인가?
의식상승는 선악의 구도에 머물지 않는다.
 
늘 말해왔듯이
모든 것은 지구운행의 필요에 의해서 존재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의식의 집합체이며 의식의 조합이다.
 
이들에게는 서로 간에 선악이라는 구도의 견해가 있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그들에게는
옳고 그름이 있으며 선악의 시비가 있다.
 
인간의 몸을 보자.
맹장이 왜 있는가?
보통은 맹장이차면 얼른 떼어 낼 것이다.
사람들은 필요도 없는 것이 왜 달려 있을까?
이런 것이 있어서 사람을 죽게 하고 병들에 하니
참으로 쓸모없는 것이라고 그렇게들 말하고 있다.
진실로 그러한가?
우리의 몸에 정작으로 필요도 없는
장기가 그렇게 붙어 있는 것일까?
하지만 알고 보면 맹장은 대단히 중요한 장기다.
맹장은 인체 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꼭 필요한 장기 중에 하나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쓸모없는 것이 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없애 버려야 한다는 말을 자주한다.
늘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급기야 그것은 체증처럼 맺혀서 미움이 되고 원망이 되며 헐뜯음이 된다.
그것이 골수에까지 차서 상대를 해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악의 축이므로 없애버려야만 한다는 규정이 있으므로 해서
없애는 데만 온힘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상대를 향해서 귀신은 뭐하는가? 저것을 안 잡아가고.......
늘 그런 푸념을 습관처럼 늘어놓게 된다.
사람 간에도 의견 대립이 있게 되면 죽도록 미워하다 서로 원망하고 한이 맺혀서
두고두고 죽이지 못해서 한이다.
 
대중들의 심성이 매우 번잡하므로
자신이 마주한 모든 것에 대하여 왜 그러한가? 라는 화두로서
조용히 명상을 통해서 자신 스스로를 관조하지 못한다.
분노와 욕설과 짜증이 나서 그것을 때려 죽여야 직성이 풀릴 만큼 화가 나는 것이다.
세상은 온통 악의 종자가 가득하고 억울하며 비참하다.
그래서 힘이 있어야 하고 돈을 많이 가져야 하고
나중에는 힘 있는 자만이 살아남게 되는 것이니
힘을 길러 이겨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상대를 이길 수 있는 거라고 말한다.
 
그들의 푸념은 늘 보면
세상이 잘 못되었고 내 부모가 할아버지가
세상이 나라가 사회가 다른 사람들이 문제야! 문제라고!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하다.
남들은 다 잘 되는데 나는 왜 이렇게 힘이 들까?
라는 한탄과 푸념이 있게 된다.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세상을 비웃으면서 세상에 등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매우불공평하며 나와는 상관없으며
너는 너 나는 나라고 규정을 한다.
 
그로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고독감과 외로움 서러움과 억울함이다.
그러면서 때로는 두렵고 불안하다.
슬퍼서 눈물이 나고 서럽다.
 
이것이 보편적인 대중들이 삶이다.
그렇게 누구나 세상을 한탄하면서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강한 관념을 길러가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에 등을 진다.
세상은 힘 있는 놈 부모를 잘 만난 놈만 잘되는 것이라는 푸념을 되뇌게 된다.
 
그렇게 늘 늘어놓는 푸념과 한탄으로 변화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로서 변화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엇이고 반복되어지는 언어는 자기 자신이 된다.
그는 한탄과 푸념이 점점 자기 자신이 되어 가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는 정작으로 스스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에게는 외부에 대한 불공평함과 억울함의 감정만이 강력하게 소용돌이친다.
 
이것은 모두 무엇인가?
아직 알지 못함으로 그러하다.
아직 이해되지 못하고 풀려지지 않은 낡은 감정들 그러한 에너지가 뭉쳐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다.
인간에게는 바램이 있지 않은가?
왜 세상은 불공평하며 왜 나는 이토록 복도 없는가?
왜 세상은 선한 사람에게만 억울한 일이 일어나고
악한 사람은 잘되느냔 말이다.
이것이 세상이 잘못되지 않고서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나는 매우 억울하며 속이 뒤집어 진다.
이런 젠장 할 놈의 세상!
 
이것이 무엇인가?
대중들의 한탄 소리이다.
 
대중들의 말이 무엇이 틀렸으랴!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다 맞는 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억울함과 원통함과 한스러움이 있어서 나오는 말인데
어찌 그러한 말이 틀렸겠는가?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당연함이 바로 고통을 만드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대중들은 순박하다.
그들은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는 것으로 한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악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대중들은 그렇게 보편적인 누구나의 삶을 살아간다.
 
의식상승는 대중들을 좋아한다.
천진하고 순박한 사람들
뭔가를 아는 것 같아도 실상은 잘 모르는 사람들
 
대중들이란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힘이 약하다.
그래서 그들은 늘 억울하고 원통하며 어리석고 가난하며 병들고 약한 사람들이다.
대중들은 늘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면서 그렇게 애처롭게 사는 사람들이다.
늘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슬프고 가슴 아픈 한을 가진 사람들이다.
가난하며 가진 것 없고 잘난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대중들은 힘이 없다.
대중들이 힘이 없다는 말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힘이 없으므로
더군다나 남까지 들여다보는 일은 더 힘이 든다.
그러니 대중들은 그렇게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깨지고 분노하고 화를 내면서도 자신의 속내를 다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미아처럼 버림 받은 사람들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들
그러면서 어린아이처럼 순박한 사람들이 대중들이다.  
서민대중들은 힘이 없고 어리석으며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어진 마음이 깃들어 있는 거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
그래서 한이 있고 서러움과 원과 한이 있는 사람들이다.
서민들 속에 진심이 있고 순박함이 있고 천진난만한 순진무구한 마음이 있다.
서민들은 힘이 없을망정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만큼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가슴에 온정으로 가득하고 순박함으로 가득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서민 대중들은 어리바리 하다.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무엇을 알아야 하나?
스스로를 자신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사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세상을 알아야 하며 자연도 알아야 한다.
지구는 하나의 조화로운 짜임이며 인류를 양육하는 거대한 시스템이다.
이것을 잘 모르면서 함부로 악의 축이나 나쁘다느니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천지간의 모든 것이 필요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렇게 돌아가니 매사에 역으로 거스르지 말고
그 속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진실로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필요에 의해서 존재한다.
잘 모르거든 입을 다물라.
하늘은 당신의 언어를 나서 늙어 돌아 갈 때 까지 한 모든 말을 다 알고 있다.
그로서 당신은 당신 자신을 늘 표명하는 것이다.
 
어두운 마음이 가리고 있는 장벽을 걷어 내고
빛나는 영의 눈을 뜨라.
그렇게 영의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라.
사하라 사막도 남극도 북극도
지상의 모든 것은 역할을 하고 있다.
지상의 어떠한 사람도 역할이 있음을 알라.
심지어 도적과 강도마저도 그러하거니와 노숙자와 걸인도 마찬가지다.
입을 꼭 다물고 있으라.
 
매사에 조급해 하지 마라.
이제는 깊은 사려를 지닌 사람으로 거듭나라.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악의 축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
스스로 각자가 선택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라.
그들이 있는 진정한 이유를 간파하라.
 
절대 어떤 인간도 허드레하지 않으니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들은 상대가 곧 나라는 경지에서 바라보기에
이제 더 이상 사람 간에 대립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디 대중들이 그러한 여유로운 관점을 지녔겠는가?
늘 타인에 대해서 원척을 지으면서 삶을 고통의 수렁으로 끌고 들어간다.  
 
심신이 안정하지 못하면 경거망동하여 천방지축 날 뛰다가 몸을 상하고 마음을 상한다.
대중들의 삶이란 위태한 것이다.
그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을 알고 있는가?
이제 본질로 환원하여 심신을 안정해야 한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나 자신을 돕는 수호령이 있으니까?
아무리 어리바리한 사람도 그를 지키는 수호령이 있다.
아마도 정말 극악한 악행을 행하지 않는 한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호령은 없으니까.
 
인간이 어리석은 마음이 깊으면 멀쩡한 길을 놔두고
스스로 죽는 길로 가는데 그때는
옆에서 수호령이 아무리 소리쳐도 듣지 못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타인을 향해서 악행을 행한 까닭이다.
그에 맞는 진화의 과정을 맞이하게 된다.
 
간혹은 매우 착한 사람이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는데
다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
전생으로부터 오는 인과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는 그 집안에 조상대에서 벌인 것이라도 자손이 받는 경우가 있다.
참으로 인간이란 정신이 모아지면 영성이 지극하되
정신이 놓으면 고행의 길이다.
 
여러분의 삶을 빛나게 하려거든 상대가 곧 나란 것을 자각하고 남을 잘되도록 해야 한다.
그는 곧 당신 자신이다.
 
지혜가 있다면 절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행하는 가혹행위이다.
상대를 그렇게 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 자신에게 그렇게 대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한탄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러하기에 그런 자리에 머물게 되는 거다.
지죄에 지가 걸려 스스로 고통 받는다.
허물은 몸이 짓고 고통은 마음이 받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가장 빠르게 허물을 벗는 방법은 사람을 대하되 하느님을 대하듯이 하는데 있다.
실상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분령이자 현신이다.
사람이 곧 하느님인줄 아는 것이 빛의 존재가 가는 길이다.
 
오늘 이러한 글이 나오는 것은 대중들로 인함이다.
대중들이 의식상승를 대하여 세상을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정말 대중들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 세상이 당신을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자신을 불행하다고 말하지 말자.
세상에는 당신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가 더 많다.
 
낮은 단계의 진화의 과정에 있는 이들은
의식상승의 말에 대하여 저항 값이 높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지 않아!”
“저건 저래서 그런 거야!”
“당신이 무엇을 알아!”
“당신이 내가 받은 고통을 겪어 봤어!”
“당신이 나라면 당신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아!”
어쩌면 이러한 반박이나 반발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대중일 수밖에.......
하지만 정말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의식상승는 대중들을 이해하지만
대중들은 의식상승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이 대중과 의식상승의 차이점이다.
 
진실로 여러분들은 상대를 이해하는가?
아직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진화의 과정이 더 필요한 것이다.
 
지금의 지구 인류는 진화의 과정에 있다.
인류는 서로 간에 이해를 잘 못하므로 대립과 분규가 있게 된다.
반복되는 분규와 대립으로 인해서 골수처럼 서로 간에 맺히는 경우도 있다.
 
나의 마음에 하나도 걸림이 없으면 그가 곧 성인이다.
나의 마음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게 만드는 공부가 성인의 공부이다.
여러분의 본질은 영이며 여러분은 누구나 빛의 존재이다.
여러분이 겪어왔던 삶으로 인해서 여러분자신과 빛의 존재를 분리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곧 빛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변을 보고 커지라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당신이 더 커져라.
주변을 변화하려 애쓰지 말고 먼저 당신을 변화하라.
당신이 먼저 세상을 이해하지 않는 한 세상도 당신을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하느님이 곧 당신 자신이다.
하느님의 아들과 딸은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본질은 하느님의 분령이다.
당신은 육신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살아있는 하느님이다.
모든 인류는 영으로서 하느님의 자녀이며 자녀는 곧 하느님과 동질이다.
다만 여러분의 영이 인간이란 옷을 입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 육신의 옷을 입고서 세상을 살다가 때가 되면 육신의 옷을 벗어내고
신의 세상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수 만번 반복한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는가?
자신이 본래 영이란 것을 자각할 때까지 반복한다.
자신이 누구란걸 자각할 때까지 반복한다.
 
지금은 여러분 자신이 빛이 되고 사랑이 되어야만 하는 때이다.
일본은 금번에 스스로가 누구인지 모르는데서 고통을 받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려는 몸부림에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인간의 고통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데서 오는 고통이다.
자신이 본래 하느님인줄 알게 되면 삶과 죽음에 자유롭다.
아무 때나 덧에 걸려서 막 죽는 것이 아니다.  
아무 때나 죽는 자는 아직 의식이 각성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죽은 자는 불쌍하다.
인간은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 빛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인간으로 살면서 자신이 본래 누구인지를 확연이 자각하는 것이 중요 한 것이다.
죽어서 깨닫는 것은 소용없다.
또다시 환생을 해야 하고 반복될 뿐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당신이 본래 빛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라.
 
자기가 누구인지를 자각한 존재는 허드레 말을 남발하지 않는다.
빛의 존재에게서 남 탓의 말이란 있을 수 없다.  
세상을 향해 악의 축이라는 폭언도하지 않는다.
빛의 존재는 모든 사물의 원리와 이치와 역할을 정확히 알거늘 어찌 그런 무지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빛은 존재는 나를 괴롭게 한 사람을 향해서 언제나 사랑의 언어를 표현하게 된다.
그가 곧 나자신임을 알기에 그렇다.
 
사람이 의식이 높아지지 않으면 늘 품격이 없는 말을 하게 되고
낮은 의식에 머물면 진동수가 떨어지면서 여러 가지 재앙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태로운 삶인가?
영성의 존재는 그런 법이 없다.
영성의 존재는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고는 재앙 속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의 본질은 영성이 거하는 빛의 존재다.
이것을 자각해야 한다.
스스로 거룩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대중들을 만나거든 빛과 사랑을 전해주라.
그리고 그들이 곧 여러분 자신이란 것을 알라. 
그들을 향해서 무한한 사랑의 빛을 방사해 보라.
그때에 여러분의 의식은 빛으로 화하게 된다.
그게 바로 빛의 존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여러분들에게는 더 이상 사고나 재앙이 없다.
빛의 존재들이 그러한 당신이 상할까 걱정하여 성심으로 보호하게 된다.
당신은 더욱 강력한 존재로 거듭날 것이요.
심오한 의식으로 존재 할 것이다.
그만큼 여러분이 거룩하다.
 
일생을 허드레 말을 하고 한탄을 하고 원망을 하며
남 탓으로 일관한 이들은 육신의 옷을 벗고도 순탄치 못하다.
사람들은 어찌 하여 자신의 삶이 그대로 남는 것을 모르는가?
세상만사에 자신의 족적은 영혼속으로 모조리 갈무리 된다.
그래서 영에 혼이 딸라 붙어서 영혼이라 한다.
사람이 완전한 자각에 이르면 영성이 높아지게된다. 
그것이 바로 빛의 존재이다.
 
영성이 발하지 못하면 죽어서나 살아서나 짙은 어둠에 가려 있다.
그들을 범부중생이라 부르고 있다.
아직 영성이 발현하지 못하는 이를 부르는 이름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허망한 말을 다 버리고
늘 사랑의 언어를 구사하자.
사랑의 언어에는 높은 파동이 담겨 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이라면
차라리 허망한 마음을 모두 버리고 세상에 봉사해 보자.
당신의 운명이 변화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말을 할 때는 꼭 주의 하자.
세상에 대한 비관적인 이야기는 낮은 파동이며 고통을 불러오는 파동이다.
 
범사에 사랑한다고 말하고 감사한다고 말하자.
어떤 사물을 대하더라도 속을 들여다 보다.
그 속에 본질이 들여 있다.
이제는 마주하는 상대를 지극히 소중히 여겨 보자.
그 사람은 몰라도 그에게 거하는 천사들이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내가 베풀어 준만큼 다시 나에게 돌려주는 것이 세상사이다.
 
세상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자.
세상에 그 무엇도 나쁘지 않다.
다 적절하다.
세상에 나와 있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분명한 존재의 이유가 있다.
모든 것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아무리 비루한 것이라도 업신여기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자.
 
밥이 있으면 대소변이 있다.
밥은 생명활동의 에너지이고 대소변은 생명활동의 잔여물이다.
먹고 싸는 것은 모두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작용이다.
우릭가 밥을 먹는 것은 매우 중하지만 대소변 작용은 어쩌면 더 중요하다.
사람들은 먹는 것을 중시하고 대소변 작용에 소흘하다.
이로서 위장병이나 장염 변비 설사 숙변 등등 배출작용의 병증을 유발한다.
사람이 만약 먹기만 하고 배출을 못한다면 그로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씀바귀나 익모초든가 쓴 것을 먹으면 입맛이 좋아지면서 조금 지나면 생기가 돈다.
단 것보다 쓴 것에서 몸이 건강해지게 된다.
단 것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몸안에 독성이 활성화 되어 몸이 녹아내리는 병증을 유발한다.
그러니 모든 것은 음양의 조화인 것이다.
 
시련이나 고통이 있어서 그것으로 삶의 힘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 유희와 환락적인 것이 너무 활성화 되면
그것으로인해 인간이 행복해 지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소멸하고 나라가 망한다.
 
세상은 모두 적절하며 양면성으로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물론 세상이 잘못된 것이 너무 많다고 하면 다 맞다.
그러나 그것을 비판만 하거나 탓만 한다고 변화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세상을 건지려면 먼저 세상에 잘 못된 것을 정화해야 한다.
세상을 정화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먼저 나를 정화해야 한다.
내가 먼저 빛이 되고 사랑이 되면 세상이 진화한다.
 
미국이나 일본 서구 열강이 있어서 세상이 변화하는가?
물리가 발달하여 세상이 변화 하는가?
그것만으로 병고에 시달리는 세상을 변형하지 못한다.
세상하는 변형하는 기술
그것이 빛의 존재다.
빛의 존재란 고진동의 에너지체다.
강력하게 돌아가는 빛과 사랑의 에너지는 세상을 진화 한다.
 
내가 빛의 존재로 거듭나는 길
그것이 의식상승의 길이다.
 
알고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좋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다.
내가 빛의 존재로 거듭나면서 심신을 안정하고 유리알처럼 투명해져 갈 때 빛의 존재가 된다.
 
이 세상은 혼자서는 힘들다.
혼자서 무엇을 하겠는가?
함께 하므로 해서 내가 잘되고 내가 행복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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