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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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우리의 삶에 항상 머무는 것이 있습니다.
싫어하고 좋아 하는 것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늘 여러분 곁에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곁에 늘 있는 것, 나의 삶에 언제나 함께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늘 나의 삶속에서 나와 하나입니다.
나의 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내가 소망했기 때문에 나의 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설령 나와 하등에 상관없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관한 것이라도 내가 지금 그것을 보거나 생각하거나 알고 있다면 그러합니다.
왜 그럴까요?
내 귀로 들리고 내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이 나입니다.
이 말이 어쩌면 대단히 어렵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이해가 있어야만 알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성이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나라는 말은 말 자체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왜 나일까요?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선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삶에 있어서 언제나 선택의 주체는 바로 여러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늘 여러분이 선택한 것은 체험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라고요? 그것을 여러분 자신이 직접 선택한 적이 없다 구요?
그러나 그렇지 않답니다.
그것은 분명히 여러분이 모두 선택하였습니다.
큰 시야로 바라보면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살아온 삶의 여정은
여러분의 신성이 신성한 계획에 따라 설정해 놓은 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그러하거니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세상 또한 우연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의 잘 짜여 진 시스템입니다.
세상은 하늘이 짜놓은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하게 돌아가는 운영체계와 같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 관한 것입니다.
“나”라는 주체가 나아가는 길, 겪어 나가는 것은 모두 여러분 자신의 영역입니다.
여러분과 관련된 모든 것을 심오한 이해 속에서 바라보세요.
지금 여러분의 곁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은 여러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소망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무언가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아직 이해가 되지 잘 되지 않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지금 싫어하는 것을 체험하고 있을까요?
반대로 왜 여러분은 좋아하는 것을 체험하고 있을까요?
이것에 대한 것도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소망했고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싫어한다. 라는 말과 좋아한다. 라는 말은 본시 하나입니다.
그것은 본래 하나의 소망에서 나왔지만 왜곡된 시야로 인해 둘로 나뉘어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든 “싫고 좋음”은 이원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과거의 낡은 이원성 에너지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아 새로운 삼원성으로 통합해 가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오한 이해의 영역입니다.
사람이 이원성에 머물면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많아지게 됩니다.
모든 것을 좋은 것 나뿐 것으로 나누는 것이 아닌 하나로 통합하여 투명하게 바라보는 삼원성에 머무세요. 통합성에서는 악도 선도 존재 하지 않습니다.
좋고 나쁜 것은 본래 존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성이 바라보는 눈입니다.
통합된 모든 것은 투명해지기 마련입니다.
통합된 것은 희석이 아니라 바로 투명해지는 것입니다.
이미 거기에 좋고 싫음은 존재한지 않습니다.
심안(心眼)이 열리면 모든 것이 훤히 드러납니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세상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나아가는 세상입니다.
세상에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은 것일까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릇된 것일까요?
세상에 옳고 그름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 본래 옳고 그름이 없다는 말도 어려운 말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원성에서는 옳고 그르며 잘못된 것과 잘된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차원 더 높아지면 그것은 오직 이해에 관한 것이고 영역에 관한 문제입니다.
지구는 깊이 들여다보면 미세한 격자로 이루어진 영역입니다. 작은 모래알처럼 작은 사물에서 바다처럼 넓은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두 하나의 영역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도 그러합니다.
신성한 계획에 따라 영혼은 각 생애마다 하나의 영역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고 영역과 역할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바라보세요.
각자가 선택한 길을 가노라고.......
한 예로 만약 이 세상에 거지가 없다면 어디에 적선적덕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거지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엔 필연적으로 거지를 도와야만 할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영역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모두 하나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해되기 전까지 그것은 언제나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영역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렇게 작동합니다.
신성한 이해가 있기 전까지는 그것은 유효한 것이고 삶의 한 부분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투명해지는 데 있습니다, 투명해지면 더 이상 여러분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은 그것은 본래부터 여러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여러분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강력하게 이해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투명해지면 모든 것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 쳐져 있는 모든 것들은 분명히 하나의 환상 체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환상이라도 이것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삶속에 늘 열정처럼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둠입니다. 그 어둠은 늘 여러분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어둠은 여러분들을 힘 빠지게 하고 지치게 할 것입니다.
때로는 어둠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번뇌 망상에 사로잡히게 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어둠은 신성한 이해 속에서 여러분으로부터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여러분들은 더 이상 무언가에 대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여러분의 것이 아니니까요.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대표적인 저 진동 물질인 술, 담배, 커피 등은 실제로 인체에 해로운 물질들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해를 주기도 하지만 해를 준다는 믿음체계에 의하여 그 해로움이 크게 가속됩니다.
술, 담배, 커피 등은 매트릭스가 제공하는 지극한 이원성을 지니고 있는 물질들로 사람들에게 그 체험은 아주 강렬합니다. 이원성이 제공해주 것들을 보면 대부분 그러합니다.
지금까지 담배라는 중독물질은 국가가 장악하여 국민들을 크게 병들게 하였습니다.
담배는 지극히 낡은 에너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담배는 피우는 사람이 정말 좋아하죠. 그러다 다시 싫어하기를 반복합니다.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 처음에는 어떤 쾌감을 주게 됩니다. 그러나 담배는 시간이 지나면 대단한 피로감을 몰고 옵니다. 담배는 사람의 폐를 심하게 압박합니다. 그리고 담배는 혈액을 탁하게 합니다. 담배로 인해 많은 병증을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담배는 피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늘 좋고 싫음을 반복합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담배에 머무는 것은 아직 담배에 대한 깊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어떤 영역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정보의 부재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알지 못합니다. 흔히 알고서도 행하는 것은 모르고 그런 거보다 더 나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안 것이 아니고 아직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깊은 이해란 바로 정말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식이 상승하면 낡은 에너지인 담배라는 물질이 그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합니다. 아니 세상에 담배가 존재하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통해서 사람의 의식이 상승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것도 담배와 같습니다.
세상이 담배라는 물질을 통해서 살짝 비쳤을 뿐입니다.
담배는 매트릭스 대한 모형입니다.
담배는 매트릭스의 종양을 오려 놓은 것과 같습니다.
어찌 담배만 그러하겠습니까? 세상을 바라보세요. 요새는 4명중에 하나는 암에 걸릴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정보는 세상을 병들에 하는 정보이지요. 소위 말하는 의사와 약사 식약청이 미리 심어놓는 세뇌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을 먹이로 삼겠다는 사전 포석입니다. 매트릭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자기들의 노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가여운건 사람들입니다. 낡은 환상에 사로 잡혀서 날마다 힘없이 먹이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각자의 심오한 선택입니다. 신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것이 어떠한 선택이라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에게는 그러한 체험을 하는 것이 이번 생애에서의 신성한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우주는 사람이 무언가를 요청하면 반드시 응답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원치 않으면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원리입니다. 빛과 사랑에서는 모든 인류에게 빛과 사랑을 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수용하는 것에 대한 선택은 항상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나 자신에 관한 것이든, 대인관계에 관한 것이든, 내가 싫어하고 좋아하는 모든 것들은 전부 나로부터 나왔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내가 소망하고 내가 끌어들인 것들입니다.
진정한 이해에서 낡은 모든 것은 종결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하더라도 낡은 것이 모두 사라지는 데는 낡은 에너지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변화하는 시간이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어떤 것은 좀 더 오래 걸릴 것입니다. 어떤 것은 약간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어떤 것은 일순간에 변화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오한 이해에서 더 이상 낡은 것들이 나에게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성한 이해에 이르게 되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여러분들의 삶을 임의대로 뜯어 고치거나 창조해 나갈 수 있습니다.
소망이란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은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누구나 가지는 바램입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인간은 소망하는 존재입니다.
소망에는 아주 작고 단순한 소망에서 거대하고 원대한 소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범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아가 사회와 국가, 더 크게는 지구에 관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이 범 우주에 이를 만큼 헤아리기 어려운 것에 이르기까지 크고 다양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소망하는 존재요 그 소망을 실현하고 이루고자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이란 이렇게 소망하고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여러분 스스로가 행복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모두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