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세리윌(Emissary Wheel)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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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세리윌(Emissary Wheel)에 대하여
12각이 상징하는 12가지 덕성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용기(勇氣)
12각에서 용기란 신성한 용기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신성한 용기는 무엇일 까요?
신성한 용기는 바로 나의 나아갈 길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모두 자신의 갈 길이 있어서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존재란 곧, 길입니다.
길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나아가야할 길은 무엇일까요?
모든 존재가 나아가야 하는 길은 근원적인 길입니다.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신성한 용기입니다.
이 길은 신성한 용기를 통해서 누구나 가야할 길입니다.
신성한 용기란 각성된 자아의 첫걸음입니다.
용기에서 자신의 신성(神性)을 바라보는 것이며, 용기에서 스스로 신성과 하나 됨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신성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참된 용기입니다.
진정한 선(善)이란 신성한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모든 인간이 가야 될 길은 신성한 용기에서 그 첫발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용기란 보는 힘이고 듣는 힘이며 아는 힘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자신의 진실을 보고 있습니까?
자신을 보는 진실한 눈이 바로 신성한 용기입니다.
지금 내가 가야할 길은 무엇입니까?
먼저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누구 입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나”라는 어원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나라는 존재는 진실로 무엇입니까?
이러한 나에 대한 명제를 가지고 나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나를 찾는 여행이란 외부세계가 아닌 내면으로의 여행입니다.
이 여행은 모든 존재가 가야할 길입니다.
한순간에 찾지 못하는 것이 나라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인내를 가지고 찾아 가다보면 나를 찾게 됩니다.
지금 바라보는 모든 것이 나이지만 깨달음의 통합이 있기 전까지는 그것은 또한 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를 찾기 위하여 나에게 조용히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 묻는 연습을 시작합니다.
길을 걸으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물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물음을 통해서 이제 우리는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하게 됩니다.
인간은 30~40년을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과의 대화를 늘 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사람은 이목구비가 외부로 나있습니다.
그것 하나만 봐도 자신을 보는 것은 어려운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나를 보는 법이라야 보통 외부를 통한 교류에서 오는 느낌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나를 보는 것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내면과의 대화법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나를 바라봅니다. 그것은 커다란 기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주는 참소리를 들어봅니다.
그 소리가 오는 곳은 어디일까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를 찾는 것 하나하나가 세상에서 정말 재미있는 일입니다.
나를 아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이기에 계속해서
나를 알아가는 것은 모든 것이 속속들이 투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안다. 라고 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래 동안 깊은 잠을 자던 인류는 너무도 깊은 잠에 취해 한바탕의 꿈을 꾸고 있는지라
날이 이미 밝았지만 잠에서 깨어나 눈뜨기를 두려워합니다.
눈을 뜨기는커녕 계속 더 잠에 취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막상 잠에서 깨고 나면 너무도 개운하고 상쾌합니다.
그러나 잠을 깨려는 마음보다 잠을 깨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두려움에 사로 잡혀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는 것이 바로 신성한 용기입니다.
진실을 바로 보는 눈이 바로 용기입니다.
12각의 신성한 용기는 바로 나아감입니다.
거기에 아무런 막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성한 용기를 발휘할 때 무한한 에너지에 의해 현실에서 무엇이든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인내(忍耐)
인내는 나를 바라보는 과정입니다.
나를 아는 자는 인내의 참 이치를 알게 됩니다.
인내란 기다림을 말합니다.
누구나 나를 찾아야하고 그렇게 발견된 나를 참답게 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인내는 시간을 담고 있습니다.
지구를 예로 들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수백억년의 역사가 있어 왔습니다.
지구는 지구의 가는 길이 있고 지구가 이루어나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지구의 이러한 모든 과정, 즉 지구의 삶! 그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인간이란 존재에게 있어서 삶이란 곧, 인내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삶의 목적은 자신을 이루어 나가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이룬다.”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를 이루는 것은 인간이 신성으로 복귀하는 것이고 신성을 발현하여 신성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은 장차 모든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들 각자는 신성한 삶을 신성이 계획한대로 살아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12각의 인내란 받아드림입니다.
그것은 곧 모든 것에 대한 포용이고 허용입니다.
이러한 신성한 인내는 모든 것을 대립 없이 허용하고 받아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12각에서 인내라 함은
“힘든데 무조건 참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기쁨에 머물면서 나아가고 기다림 속에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인내는 기쁨이며 풍요입니다.
인내란 말속에는 결실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인내라는 과정을 통해 사랑에 집중하고 그러한 기운을 모으면 자신의 완성해 나가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나를 찾고 나를 알며 나를 이루는 과정이 바로 인내입니다.
그래서 인내는 신성을 자각하는 과정에서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쉬운 길입니다.
신성한 계획에 따라 지구에서 인간 존재의 신성이 깨어나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경이롭고 황홀한 과정입니다.
신성이 드러나서 빛을 발하는 그 순간부터 신성이 나아가는 각 과정마다 인내를 통에 신성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기가 씨앗이라면 인내는 씨앗이 싹을 트이고 자라나도록 돕는 에너지입니다. 이 세상에 나의 신성이 발현되는 것은 용기와 인내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성한 인내는 기쁨이고 행복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인내하는 자는 늘 기쁨 속에 머물면서 신성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지혜(智慧)
지혜는 인간이 본래 빛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은 곧 사랑이며 사랑은 빛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지혜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길을 가고 있는 기초를 이루고 있는 까닭입니다.
지구라는 물질행성은 어둠의 미궁입니다. 이러한 미궁을 헤쳐 나가는 등불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을 바탕하고 있는 존재의 내면에는 빛이 가득합니다.
지나온 시간 칠흑같이 어두운 이 행성 위를 걸어갔던 수많은 선각자들의 발걸음은 바로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랑의 빛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길을 걷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찾아가는 마음이 있어서 본연의 길로 향합니다.
그 길은 본래 자신이 왔던 길입니다.
그 길은 신성의 나아가는 길입니다.
신성한 지혜란 인간 삶의 경이적인 해법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고속도로 와 같이 시원스레 훤하게 열려 있습니다.
이 상징하듯이 자신의 신성에 접속된 존재는 신성으로부터 솟아나는 무궁한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그 지혜는 근원을 비추는 등불이며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밝혀나가는 힘입니다.
목마른 자에게 한잔의 감로수는 심신을 되살리는 생명수 이듯이
신성한 지혜는 물질로부터 오는 만 가지 제약과 장애로부터 무한한 자유를 얻는 길이 됩니다.
신성으로부터 발현되는 신성한 지혜에서는 무한히 원만하고 넉넉하여 아무런 막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성한 지혜는 천지를 밝히는 햇살처럼 인생의 미궁을 환하게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
신성한 지혜가 발현되는 이여! 그대의 여유로움은 그대 스스로에게 잔잔한 미소를 피어나게 하리니 참으로 그러합니다.
확신(確信)
확신이란 앎을 말합니다.
확신이란 분명한 깨달음입니다.
확신은 존재에 대한 깨우침으로 즉, 존재에 대한 자각입니다.
나를 알고 만사를 아는 것이고 나아가 우주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확신이란 궁극적으로 우주를 이루는 근원적 단위입니다.
지구가 운행하는 기본 축 자체부터 바로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믿음이 있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믿음은 세워 나가는 것이지 스스로 본래부터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나아갈 길과 하나하나 마주치는 모든 것은 내가 세워 나가야 할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연결하는 고리입니다.
믿음을 잃으면 이러한 연결 고리는 단절되고 그것은 곧, 폐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믿음은 생명과 같은 작용을 합니다. 믿음이 곧 생명인 것입니다.
확신이란 새로운 파라다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12각의 나아감에는 오직 성공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보는 힘이 없으면 을 알아 볼 수 없습니다.
12각의 근원적 에너지는 인간을 본질로 환원하여 불사의 몸을 이루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자각 또한 확신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의 4번째 단계인 확신은 우주가 지탱하는 근원의 힘입니다.
신(信)이란 모든 성인과 현인들이 걸어갔던 길입니다.
지금 지구인류가 깨어나서 명확히 보아야 할 것은 바로 확신입니다.
확신이란 나를 알고 남을 알며 작은 사물에서 우주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이해하는 것이며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미혹이 없는 마음을 말합니다.
믿음은 사랑과 이해의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신이란 우주의 근원적인 삼각구조인 정성과 공경과 믿음의 기틀이기도 한 것입니다.
확신이란 모든 마법의 비밀이며 스스로를 자각한 자의 여일한 마음입니다.
자비(慈悲)
자비란 생명에 대한 외경을 말합니다.
어원적으로도 사랑자(慈)에 슬플비(悲)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이해를 배우는 곳입니다.
지구는 나를 바라보는 곳입니다.
지구는 거대한 거울입니다.
우리가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연민(憐愍)의 정으로 바라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를 바라볼 때 지금보다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해란 모든 것을 하나하나 풀어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깊은 이해 속에서 바라본다면 상대에 대한 오해 같은 것은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존재마다 가는 길이 있고 그러한 길을 가다가 때론 힘들고, 때론 기쁘고, 때론 슬프며,
온갖 험난한 고초를 격으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기특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현재 지구의 인류는 50억 이상이고 이러한 인류는 각기 자신의 선택에 의한 자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구 인류를 바라보는 시야를 배우는 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인간은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듣는 존재이고,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차하면 외부세계가 자신이 아닌 것으로 알고 가혹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는 나를 반영하는 거울로서 깊이 있게 이해하고 존중하고 해야 할 존재입니다.
말과 행동에서, 생각과 마음에서 깊은 자비심이 깃들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살아가려면 모든 사물에 대한 절대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고자한다면 우리의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즉, 개미와 같은 작은 생명체부터, 인간이란 지고한 존재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존엄함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모래알같이 작은 사물에서 시작해서 거대한 지구에 대한 이해에 이르고
나아가 장대한 우주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깊이 있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있어야만 모든 것을 자비로서 바라보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을 존중하고 공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 지고한 덕성의 하나인 자비는 모든 존재와 사물을 바라볼 때 커다란 이해와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깨닫고 보면 모든 존재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더 깊이 있게 깨달음에 이르면 모든 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이고 모든 것이 나 자신입니다.
따라서 완전한 통합의 정신이 바로 자비의 참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쁨(喜悅)
인간이 자신의 신성과 하나 되는 상태가 바로 기쁨에 머물 때입니다.
사람은 기쁨 속에 머물게 되면 그 순간 자신의 신성과 통일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이란 슬픔에 대한 반대적인 의미의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대향 물이 없는 것으로서 지고한 신성의 존재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성은 언제나 기뻐합니다.
신성은 본래 빛이고 사랑이기에 언제나 고요와 평온과 기쁨에 머물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언제나 기쁨 속에 머물러야 일이 잘되는 시대입니다.
사람이 항상 기쁨 속에 머물면 신기하게도 커다란 행복이 저절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쁨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삶을 행복하게 하는 비결입니다.
이제는 의식이 모든 것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마음만으로 한다고 내가 원하는 일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란 본래 실체가 없어서 한바탕 봄꿈과 같은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천 번씩 뒤바뀌는 나의 마음은 내가 아닙니다.
하늘의 구름을 보세요. 하루 종일 쉼 없이 변화하니 구름은 그 실체가 없습니다.
마음 또한 이와 같이 실체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마음만 믿고 있다가는 언제 그 마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할지 모릅니다.
마음은 좋게 해놓아야 할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마음이 나의 본질이 아닙니다. 오직 나의 실체는 영입니다.
나는 바로 영입니다.
이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
단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혹시라도 안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안 된다는 생각뿐입니다.
인간이 기쁨 속에 머무는 것은 무한한 권능입니다.
기쁨은 영과 통하는 문입니다.
자신의 신성을 보고 싶거든 먼저 기뻐하십시오.
기쁨은 영이고 영은 만사를 형통케 합니다.
영이 하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나의 신성을 발현하여 신성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여러분이 기쁨에 머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임계수치의 최고 정점에 이르면 모든 것이 일시에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크게 깨달은 선각자들이 지구 곳곳에 포진하고 있게 되면 거대한 망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깊이 있게 각성한 존재들이 곳곳에서 일정한 망을 형성하게 되면
그물망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자신도 모르게 높은 의식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지구인류가 발전해온 원리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신성을 발현하여 늘 기쁨 속에 머무는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쁨 속에 머물게 되고 그러한 존재들이 세상에서 나날이 늘어난다면
장차는 이 세계가 높은 차원으로 상승하는 속도를 앞당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기쁨 속에 머무는 것은 영성을 추구하는 존재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은 깨달음의 시대입니다. 높고 낮음 없이 지금은 모두가 스스로를 자각하는 시대입니다.
지금은 빛의 시대이고 사랑의 시대입니다.
이제 지구인류는 모든 부정의식과 낡은 에너지로부터 해방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시대는 기쁨의 시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통해서든 자신을 기쁘게 하세요. 누구에게나 기쁨을 전해 주세요.
그것이 스스로 기쁨 속에 머무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늘 기쁨 속에 머무는 것은 참으로 합당하다 할 것입니다.
언제나 기쁨 속에 머무세요! 모든 행복을 이루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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